글 쓴 이 livemiri (2010-07-22 19:09:44, Hit : 31, Vote : 2)
연 결 #1 http://blog.paran.com/livemiri
제 목 일본서기 신공섭정전기의 栲衾新羅國 정벌 기록
고구려 고분벽화 중 사신도 제작기법은 벽에 灰를 칠하고, 칠한 회가 마르기 전에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기법으로 제작되었는데 프레스코(fresco painting)라고 한다. 이처럼 무덤의 벽 또는, 종이, 캔버스, 비단 같은 2차원의 평면에 그리는 그림을 ‘회화[繪畵]’라고 하는데, 이것은 재료나 기법에 따라서 여러 종류도 구분된다. 그 중에 투명 수채화가 있다.
그리는 방법은 먼저, 4B연필로 밑그림을 그리고, 그 다음 수채화 물감으로 밑그림 위를 투명하게 채색하면 된다. 그림이 완성된 후에도 자세히 보면, 밑그림이 보이는 양식이다.
필자가 왜 느닷없이 투명수채화 이야기를 할까??
그 이유는 일본서기를 읽다보면, 이렇게 투명수채화를 만드는 방법과 같은 방식을 기록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아래의 원문을 살펴보자.
●『日本書紀』卷八仲哀天皇八年(己卯一九九)九月己卯《五》◆秋九月乙亥朔己卯。詔群臣以議討熊襲。時有神託皇后而誨曰。天皇何憂熊襲之不服。是膂完之空國也。豈足擧兵伐乎。愈茲國而有寶國。譬如處女之■。有向津國。〈■。此云麻用弭枳。〉眼炎之金銀彩色多在其國。是謂栲衾新羅國焉。若能祭吾者。則曾不血刃。其國必自服矣。復熊襲爲服。其祭之。以天皇之御船及穴門直踐立所獻之水田名大田。是等物爲幣也。天皇聞神言。有疑之情。便登高岳遙望之。大海曠遠而不見國。於是。天皇對神曰。朕周望之。有海無國。豈於大虛有國乎。誰神徒誘朕。復我皇祖諸天皇等盡祭神祇。豈有遺神耶。時神亦託皇后曰。如天津水影押伏而我所見國。何謂無國。以誹謗我言。其汝王之。如此言而遂不信者。汝不得其國唯今皇后始之有胎。其子有獲焉。然天皇猶不信。以强擊熊襲。不得勝而還之。
///////// 일본서기
위 기록을 대략 살펴보면,
‘중애와 군신들이 熊襲을 토벌할 것을 토의하였으나, 신공황후는 熊襲보다는 더 알짜배기인 栲衾新羅國을 치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중애의 입장은 栲衾新羅國이 없다는 것이고, 신공의 말을 믿지 않고, 熊襲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는 것이다.
일본서기를 계속 읽어보면, 중애는 熊襲에 대한 공격이 실패한 후, 재위 9년 2월에 돌연히 사망하게 됩니다. 신공은 남편인 중애의 장래도 치르지 않고 신라를 공격하여 중애9년 10월에 栲衾新羅國을 정벌하는데 성공합니다.
일본서기 신공섭정기는 신공섭정전기(중애9년)에 신공이 이 栲衾新羅國을 정벌하는 과정을 아주 소상히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 때 신공의 주장하는 내용 가운데, 살펴보아야할 것이 있다.
/// 譬如處女之■。有向津國。〈■。此云麻用弭枳。〉眼炎之金銀彩色多在其國。是謂栲衾新羅國焉。/// 비유를 하면 處女의 ■(■, 이를 麻用弭枳라 한다.)과 같고, 津을 향하고 있는 나라가 있다. 눈이 부신 금 은 채색이 그 나라에 많이 있다. 이를 栲衾新羅國이라 한다.
참고 // 栲衾新羅國에서 栲는 첨부한 그림화일을 보시기 바랍니다. 글자모양이 좀 다릅니다.
오늘 필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栲衾新羅國’이 무엇인가?]이다. 이제까지의 연구자들 사이에서 가장 기본적인 시각(통설)은 이 栲衾新羅國을 경주의 신라국이라고 이해한 것이다. 栲衾新羅國에 대한 정확한 분석도 하지 않고, 그냥 신라라는 표현이 있으니, 이것은 당연히 경주에 있는 신라다. 그리고, ‘栲衾는 沈詞이다.’하고는 끝내버렸다는 거죠.(沈詞-웃기는 표현이죠. 아무런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관용구처럼 붙어 있는 말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있으나 마나” 뭐 이정도)
戰前의 일본인 학자 중에는 이 중애8년과 9년(신공섭정전기)의 기록을 통하여(그 외에도 여러 근거를 제시했죠.) 왜가 한반도를 지배한 것으로 확신하고 한반도를 강제합병한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를 폈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이 기록은 단순히 전설이고, 일본서기 저자들이 ‘신라에 대한 악감정을 기록해 둔 것 정도’로 폄하하고 무시로 일관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북한의 김석형이라는 역사학자가 일본서기의 기록을 분석하면서 이 기록들은 삼국이 일본에 건설한 분국의 역사라는 주장을 하였고 근 10년 정도 일본인의 입을 막아(?) 놓았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한국, 북한, 일본의 역사학자들 간에 이견이 많이 있죠.
하여튼 일본서기 중애8년과 9년(신공섭정전기)의 기록은 우리에게 이제까지 아주 기분 나쁘게 생각되는 기록이었죠. 그런데 필자가 보기에는 이 기록을 제대로 이해한 학자는 단 한명도 없었는 것 같아요.
먼저,
1. 많은(?) 연구자들은 栲衾新羅國과 경주에 도읍한 신라를 동일한 나라로 파악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것이 동일한 나라라고 주장한 것은 新羅라는 글자 두 개 밖에 없어요.
2. 경주에 잇는 신라와는 위치가 너무나 달라요.
경주에서 바닷가를 갈려면 포항, 감포, 울산 등으로 꽤 멀리가야해요.
근데 위에 보여드린 원문은 有向津國으로 되어 있어요.
3.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면, 신공은 栲衾新羅國을 정벌할려고 하는데 그 위치가 어디인지도 몰라요. 중애는 아예 그런 나라는 없다고 인식했어요.
중애와 신공의 커다란 인식차가 무엇을 의미할까?
아주 간단해요.
필자는 貴國이 신라로부터 탈옥을 감행하는 시기를 4세기 중엽으로 주장했어요. 그 당시 예전 伽倻의 영역에서 많은 나라들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여 신라로부터 탈옥을 감행하는데, 임나, 탁순, 貴國 이런 여러 나라들이 다 같이 신라로부터 탈옥을 하려고 하였죠. 이 栲衾新羅國도 바로 그러한 나라 중의 하나라는 것이에요.
신공은 風聞으로 그 나라의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그러니, 전쟁을 하고 싶은 나라의 정확한 위치를 모르고 있어요. 신공섭정전기 하4월조의 기록을 보더라도 栲衾新羅國을 ‘서쪽 재보의 나라(朕^西欲求財國)’라고만 하고 있어요. 신공섭정전기 추9월의 기록에도 서쪽에서 나라를 찾지 못하고 막연히 있을 것이라고 추측을 하는 내용이 보여요.
이상한 생각이 안들어요.
신공의 귀국이 일본열도에 있고, 栲衾新羅國이 지금의 경주라면 말도 안되는 기록들이죠.
신공섭정전기 동10월 드디어 신공은 栲衾新羅國을 찾았나 봅니다.
신공은 栲衾新羅國에 도달합니다. 큰 고기와 순풍이 배의 징행을 돕고 노를 쓸 필요도 없이 栲衾新羅國에 도착했어요.
이 때 신라왕은 백기를 들고 항복을 합니다. 이 때 신라왕이 신공의 貴國을 동쪽의 신국이라하는 표현보이죠. 귀국과 栲衾新羅國은 동서에 위치하고 있는 나라라는 것이죠.
자 그런데 일본서기는 신공섭정전기(중애9년) 말미에 一云 두 개를 같이 기록해 두었어요.
필자가 먼저 투명 수채화를 언급한 것 기억나죠.
一云。足仲彦天皇居筑紫橿日宮。是有神託沙麽縣主祖。內避高國避高松屋種。以誨天皇曰。御孫尊也。若欲尋寶國耶。將現授之。便復曰。琴將來以進于皇后。則隨神言而皇后撫琴。是神託皇后。以誨之曰。今御孫尊所望之國。譬如鹿角以無實國也。其今御孫尊所御之船。及穴戶直踐立所貢之水田名大田。爲幣能祭我者。則如美女之 。而金銀多之眠炎國以授御孫尊。時天皇對神曰。其雖神何謾語耶。何處將有國。且朕所乘船旣奉於神。朕乘曷船。然未知誰神。願欲知其名。時神稱其名曰。表筒雄。中筒雄。底筒雄。如是稱三神名。且重曰。吾名向匱男聞襲大歷五御魂速狹騰尊也。時天皇謂皇后曰。聞惡事之言坐婦人乎。何言速狹騰也。於是神謂天皇曰。汝王如是不信。必不得其國。唯今皇后懷姙之子。蓋有獲歟。是夜天皇忽病發以崩之。然後皇后隨神敎而祭。則皇后爲男束裝。征新羅。時神導之。由是隨船浪之遠及于新羅國中。於是新羅王宇流助富利智干。參迎跪之。取王船旣叩頭曰。臣自今以後。於日本國所居神御子。爲內官家。無絶朝貢。
一云。禽獲新羅王詣于海邊。拔王■肋令匍匐石上。俄而斬之埋沙中。則留一人。爲新羅宰而還之。然後新羅王妻不知埋夫屍之地。獨有誘宰之情。乃誂宰曰。汝當令識埋王屍之處。必篤報之。且吾爲汝妻。於是宰信誘言。密告埋屍之處。則王妻與國人。共議之殺宰。更出王屍葬於他處。時取宰屍。埋于王墓土底。以擧王■■其上曰。尊卑次第固當如此。於是天皇聞之。重發震忿。大起軍衆。欲頓滅新羅。是以軍船滿海而詣之。是時。新羅國人悉懼不知所如。則相集共議之。殺王妻以罪。
앞의 一云을 보면
新羅王宇流助富利智干라는 표현이 보입니다. 앞에 필자가 7년 전에 작성했던 글을 게시해 놓았어요.
新羅王 + 宇流助富利智 + 干
新羅王은 栲衾新羅國의 왕이라는 말이고, 그의 이름은 宇流助富利智이며, 그 뒤에 붙어 있는 ‘干’은 바로 그가 경주에 있는 신라왕에게 밭은 벼슬이에요. 宇流助富利智가 경주에 있던 신라왕이 아니에요.
宇流助富利智의 栲衾新羅國이 貴國에게 정복햇다는 소식이 출렁이는 물결에 이끌려 백제에 알려지게 되었어요. 백제는 사신을 보내 그 나라를 찾게 합니다.
신공 46년조를 보죠.
卓淳王末錦旱岐를 찾아온 귀국의 斯摩宿禰 그리고 百濟人 久■, 彌州流, 莫古가 보이죠.
여기서도 탁순왕은 末錦 + 旱岐 에요. 末錦은 이름이고 旱岐는 경주의 신라왕이 내려준 벼슬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다음에 계속,........
ver. 0.00000.0722♡♡♥
추가 1/////
livemiri (2010-07-22 20:58:48)
日本書紀卷六垂仁天皇二年 是歲조를 보면 ‘一云’을 인용한 기록이 있는데, 그 곳에도 干岐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
對曰。意富加羅國王之子。名都怒我阿羅斯等。亦名曰于斯岐阿利叱智干岐。
/////
意富加羅國王의 子에게 “무슨무슨 + 干岐”
일본서기는 王子에게도 干岐를 사용한 경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旱岐 干支 干’을 경주의 신라왕이 자신의 신하에게 내려준 벼슬(관등)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파악하는 것은 卓淳國과 임나(意富加羅國) 또는 貴國 등이 신라로부터 독립을 시작하는 시기가 4세기 중엽이고 신공섭정기의 기록은 그로부터 멀지 않은 시기로 파악하기 때문에, 저의 주장에서 ‘독립의 움직임이 있기 전 신라가 내려준 것을 그대로 쓰고 있다.’는 의미를 명확히 하지 않은 것은 저의 잘못 같습니다.
추가 1/////
livemiri (2010-07-22 21:50:13)
일연이 삼국유사에 가락국기를 인용해 놓았습니다.
가락국기에는 九干으로 알려진 아도간 이하 ‘여러 干’들을 기록해 두었는데, 나중에 그 干들의 호칭을 바꿉니다.
“이리하여 아도(我刀)를 고쳐서 아궁(我躬)이라 하고, 여도(汝刀)를 고쳐서 여해(汝諧), 피도(彼刀)를 피장(彼藏), 오도(五刀)를 오상(五常)이라 하고, 유수(留水)와 유천(留天)의 이름은 윗 글자는 그대로 두고 아래 글자만 고쳐서 유공(留功)․유덕(留德)이라 하고 신천(神天)을 고쳐서 신도(神道), 오천(五天)을 고쳐서 오능(五能)이라 했다. 신귀(神鬼)의 음(音)은 바꾸지 않고 그 훈(訓)만 신귀(臣貴)라고 고쳤다.”
저의 상상인데, 일본서기에 궐사시대라고 알려진 신무이하 숭신에 이르기까지 9명의 천황이 있지 않습니까? 제가 복원한 기년으로 삼국사기와 비교하면 그 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래서 저는 이 가락국기에 기록되어 있는 9개의 호칭이 수로왕의 아들인 綏靖천황 이하의 후손들에게 내리 준 가락국기의 시호가 아닌가?
출처 : http://www.history21.org/zb41/view.php?id=discuss2008&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7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