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수리비에 보이는 此七王等과 양서 신라전의 旱支
양서 신라전에서 좀 더 살펴 보아야할 구절이 있다.
/////먼저
無文字, 刻木爲信. 語言待百濟而後通焉.
이 당시(6C초) 신라인의 문자 생활에 대한 정보는 최근에 발견된 중성리비나 예전에 발견된 봉평비, 냉수리비 등을 통하여 얻을 수 있다. 이러한 신라고비는 당시 신라인들이 문자(한자)로 기록된 문서를 가지고 행정적, 사법적 등등의 통치행위를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신라인들은 한자를 이용하여 중앙정부의 뜻을 지방민들에게 알리는 비석을 세운 것이다.
그리고, 신라고비의 기록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 가운데 또 다른 하나는 ‘신라인들은 한자를 사용하기 위해서 한자라는 문자가 가지고 있는 포괄적 기능(음과 훈, 글자의 모양, 문장이 구성되는 형식, 문법적인 문장을 만드는 방법 등등)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양서 신라전에 기록된 ‘無文字’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이것은 ‘신라인들에게 고유의 문자가 없었다.’는 의미이거나, 아니면 ‘신라에서 파견된 사신들이 양의 관리와 접촉하면서 한자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추론은 뒤에 이어지는 문장 ‘刻木爲信’에서 명확해 진다. ‘信’이라는 한자는 두 사람 사이에 어떠한 관계가 존재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바로 신라사신들 사이의 ‘信’을 말한 것이다. 그러니, ‘刻木爲信’한 것은 신라사신끼리의 ‘은밀한 대화’나 ‘중요한 정보에 대한 기록’ 등으로 이해될 수 있다.
추측을 해보면, 그 들은 양으로부터 보고 들은 것 중 ‘중요한 정보’나 ‘좀 더 발전된 제도’ 등을 자신만이 이해할 수 있는 표시를 이용하여 신라로 가지고 왔고, 그 것은 신라를 좀 더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들이 한자를 사용하여 양의 관리와 대화를 했다면, 말은 통하지 않더라도 자신들의 의사를 전달하기에는 충분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신라의 사신들이 한자를 통하여 양의 관리와 대화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語言待百濟而後通焉’이라는 표현을 통하여 더욱 명확히 알 수 있다. .........^^
신라의 사신들은 당당하게 자신의 말로 대화를 하였던 것이다.
전체 문장을 다시 보자.
無文字, 刻木爲信. 語言待百濟而後通焉. ^^
[문자가 없어 나무를 새겨 신표로 삼는다. 말은 백제를 기다린 이후 통한다.(백제사신의 통역이 있은 후 소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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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사신의 통역으로 신라사신과 양의 관리가 나눈 대화 중 일부의 것들이 양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 것은 아래와 같다.
.........其官名, 有子賁旱支, 齊旱支, 謁旱支, 壹告支, 奇貝旱支 其冠曰遺子禮, 襦曰尉解, 袴曰柯半, 靴曰洗.
기록을 보면 신라의 관직명으로 子賁旱支, 齊旱支, 謁旱支, 壹告支, 奇貝旱支 등이 있다. 이것은 신라인들의 관등에 대한 연구를 하기 위한 기본 자료 중 하나이다.(남사에는 ‘其官名 有 子賁旱支, 壹旱支, 齊旱支, 謁旱支, 壹吉支, 奇貝旱支’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신라인들도 금석문에 자신들의 관등에 대한 기록을 남겨 놓았다.(이것은 막강한 1차사료이다.) 울진봉평비는 상위 관등이 먼저 기록되어 있으며, 영일냉수리비는 소속 部를 우선으로 기록되어 있다. 비문에 기록된 관직명을 살펴보면, 울진봉평비는 ‘干支, 太阿干支, 阿干支, 一吉干支, 居伐干支’ 등의 관직명이 보이고, 영일냉수리비에는 ‘干支, 阿干支, 壹干支, 居伐干支’ 등이다. 그리고 천전리 각석의 원명과 추명에는 ‘壹吉干支, 沙干支, 居伐干支, 파珎干支’ 진흥왕巡狩碑에는 ‘一伐干, 一尺干, 迊干, 沙尺干, 一吉干’ 등이 보인다.
참고로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一 伊伐湌, 二 伊尺湌, 三 迊湌, 四 波珍湌, 五 大阿湌, 六 阿湌, 七 一吉湌, 八 沙湌, 九 級伐湌, ”이 기록되어 있다.(신라본기 유리왕 9년조)
대다수의 연구자들은 양서에 기록되어 있는 齊旱支, 謁旱支, 壹告支, 奇貝旱支를 삼국사기 등과의 비교를 통하여(거의 대부분 소리값에 의존한 것으로 보인다.) 齊旱支=迊湌, 謁旱支=阿湌, 壹告支=一吉湌, 奇貝旱支=級伐湌에 대응시키고 있다. 양서도 울진봉평비처럼 상위 관등을 먼저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신라인들의 기록 어디에도 子賁旱支나 그와 유사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단지 봉평비와 냉수리비에 그에 대응한다고 추측되는 ‘干支’라는 관등명이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子賁旱支’에서 ‘子賁’은 무엇일까?
상상을 해본다.
양의 관리가 백제 사신에게 신라 사신의 소개를 부탁하였다.
백제 사신 曰
“저분(은) 干支(=子賁旱支), 그리고, 迊旱支(=齊旱支), 阿干支(=謁旱支), 壹吉干支(=壹告支), 居伐干支(=奇貝旱支) 라고 한다오.”
양서를 통하여 신라의 사신단을 유추해 보면, 최소한 5명 이상의 干支급 고위관료와 그들의 수행원이 있었을 것이다. 신라사회가 ‘여러 왕들이 버글버글거리는 사고’로 접근한다면 신라정부가 양에 보낸 사신들도 ‘5명의 왕’으로 이해해야한다. 이것은 코미디이다.
이 점은 영일냉수리비의 한 부분을 살펴보면 명확히 알 수 있다.
“.......沙喙至都盧葛文王⧠德智阿干支子宿智居伐干支喙尒夫智壹干支只心智居伐干支本彼頭腹智干支斯彼暮⧠智干支此七王等共論.......”
이 기록에서 아직도 此七王等이라는 표현을 ‘7명의 왕’으로 이해하는 시각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몇 년 전 此七王等에서 왕은 ‘至都盧葛文王’을 가리키고, 等은 6명의 신하인 ‘⧠德智阿干支子宿智居伐干支喙尒夫智壹干支只心智居伐干支本彼頭腹智干支斯彼暮⧠智干支’를 가리키는 표현이라는 논증을 하였다.
‘此七王等’이라는 한자표현을 우리말로 번역을 하면 [‘1명의 왕과 6명의 신하’들]이라 뜻이다.
참고로 몇 년 전 필자가 논증한 ‘此七王等’에 대하여 약술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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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문에는 此二王, 此二人, 此七人 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2. 此二王은 ⧠夫智王 乃智王을 지칭하는 것으로 두 명 모두 왕이다.
3. 此七人은 沙喙壹夫智奈麻到盧弗須仇休喙耽須道使心訾公喙沙夫那⧠利沙喙■那支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들 모두는 ‘왕이 아닌 사람(人)’이다.
4. 此二人이라는 표현도 마찬가지로 두명의 ‘왕이 아닌 사람(人)’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沙喙至都盧葛文王⧠德智阿干支子宿智居伐干支喙尒夫智壹干支只心智居伐干支本彼頭腹智干支斯彼暮⧠智干支此七王等’에서
5. 앞의 7명이 모두 왕이면 비문에는 ‘此七王’으로 기록되어 있어야 하고, 7명이 모두 왕이 아니라면 비문에는 ‘此七人’으로 기록되어 있어야 한다.
6. 그러나 7명은 ‘1명의 왕과 6명의 ‘왕이 아닌 사람(人)’을 가리킨 것이므로 비문에는 ‘此七王’으로도 ‘此七人’으로도 기록할 수가 없다. 그래서 어정쩡하게 ‘此七王等’이라는 표현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7. 그리고, 村主臾支干支 須支壹今智를 此二人으로 표현한 것은 냉수리비가 ‘干支’를 ‘人(신하,관료)’으로 인식한 명명백백한 증거이다.
8. 그래서 ‘此七王等’이라는 표현은 [‘1명의 왕과 6명의 신하’들]이라 뜻으로 이해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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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2009년 10월 14일
출처 : http://www.history21.org/zb41/view.php?id=discuss2008&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641
<추가 1>
livemiri (2009-10-09 20:09:12)
중성리비의 이체자 문제
중성리비를 보면 喙나 伐의 일부 획이 보이지않고, 또 蘇의 경우는 글자의 좌우가 바뀌어 잇습니다. 이러한 점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저의 시각은 “비를 세우는데 관여한 사람들이 한자를 완벽하게 습득하지 못함에서 나타나는 현상이 아닐까?”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대학에서 한문학을 강의하시는 교수님들이 주축이 되어 중요한 비석을 세우는 경우와 고등학교에서 중간 정도하는 학생들이 재미삼아 한문 비석을 세우는 경우를 비교하면 어떨지????
아마 전자는 유려하고 격조 높은 문장으로 비가 완성될 것이며, 후자는 획의 틀림도 많고 더러는 우리말어순의 한문문장도 많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저가 중성리비를 바라보는 시각도 위와 같습니다.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使人과 또 비문 말미의 典書 与牟豆, 沙喙 心刀里(?) 등이 비문을 세기고 비석을 세웠을 것입니다.
먼저 언급한 바와 같이 使人의 부명과 관등명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典書를 한 与牟豆에게도 부명과 관등명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들은 奈麻급 이상의 고위 신분자에 비해 학습이나 교육의 혜택을 상대적으로 적게 받았을 가능성이 아주 많습니다. 이러한 신분이 아주 낮은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이루어진 立碑과정에 의하여 ‘잘못된 자획(지금으로 치면 오타)이 많이 발생하지 않았나’ 추측합니다.
비슷한 시기의 냉수리비와 비교해 보면 냉수리 비는 典事人인이 沙喙壹夫智奈麻를 포함한 7명인 것과 좋은 비교가 된다고 봅니다.
저는 냉수리비, 중성리비 등의 비교를 통하여 이 당시 신라사회는 ‘일상생활에서 완벽한 한자생활을 하는 지배계층(?)’과 ‘교육의 혜택을 적게 받아 문자생활이 서툰 경우’를 보여주는 명확한 물증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출처 : http://www.history21.org/zb41/view.php?id=discuss2008&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6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