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部 표기의 일관성에 대하여,... 등등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728

글을 올릴까 말까 많이 망설였지만 올리기로 마음을 먹었기에 이 글을 씁니다. 저는 “역사21”(http://www.history21.org/)이라는 역사토론사이트에서 틈나는대로 역사관련 글을 livemiri라는 필명으로 적었던 역사 아마추어입니다. 이번에 포항중성리비가 발견되었는데 그에 대하여 필자 나름대로 여러 가지 사고를 하였고, 그 것들을 글로 적어 여러 역사 애호가들과 토론을 벌이곤 하였습니다.
제 글은 다듬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 때 그 때 생각한 것들을 적은 것이라 조잡하기도 합니다. 불쑥 귀학회의 홈페이지에 무례하게 글을 남기는 점에 대하여 나무라지 마시고, 저의 글을 읽어주시길 청합니다. 아래는 예전 제가 썼던 글들입니다.

귀학회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livemiri (2009-09-01 22:09:20)

部 표기의 일관성에 대하여,...


시간이 많지 않아 포항 중성리신라비문에 있는 것과 보고서에 있는 한 구절을 간단히 분석해 볼려고 합니다.


비문의 기록 /////
喙部03)習智阿干支04)沙喙05)斯德智06)阿干支」
敎07)沙喙尒抽智奈麻08)喙部夲09)智奈麻
/////

보고서는
“喙部의 習智 阿干支와 沙喙의 斯德智 阿干支가 沙喙의 尒抽智 奈麻, 喙部의 本智 奈麻에게 敎(지시 또는 명령) 하였다.”

로 번역해 놓았습니다.



p20을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이 포항 중성리비에서의 나타나는 고유명사들의 표기 방식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은 규칙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즉, 대부분의 고유명사들이 「部名(혹은出身地名) + 人名 + 官等名」의 순서를 가지고 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첫부분의 ‘喙部習智阿干支沙喙斯德智阿干支’의 경우, ① 喙部(부명) + 習智(인명) + 阿干支(관등명)와 ② 沙喙(부명) + 斯德智(인명) + 阿干支(관등명)로 두 사람의 출신부(지역)와 사람 이름, 그리고 그의 관등명을 결합한 형태이다.///




보고서의 기록을 간단히 도식화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喙部+習智+阿干支 沙喙+斯德智+阿干支」

沙喙+尒抽智+奈麻 喙部+夲智+奈麻


저의 생각은 좀 다릅니다.
먼저 인명표기에서 [부명+인명+관등명]으로 되어 있는 부분의 구분방법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구분되어야 부명을 표기하는데 일관성이 있다고 판단합니다.

喙+部習智+阿干支 沙喙+斯德智+阿干支」

沙喙+尒抽智+奈麻 喙+部夲智+奈麻

이렇게 구분이 되어야 喙部와 沙喙部에서 다 같이 部를 생략해서 喙와 沙喙로 표기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은 시간이 없어 이것 하나만,....
감사합니다.



livemiri (2009-09-01 22:18:46)

위에 있는 저의 글의 요지는

喙部習智阿干支와 喙部夲智奈麻는
“喙(부)의 部習智 阿干支 그리고, 喙(부)의 部夲智 奈麻로 파악하여, 部를 포함한 部習智(3자)와 部夲智(3자)가 인명으로 파악된다.
그래서, 비문은 처음부터 部가 생략된 형태로 喙(부)와 沙喙(부)가 기록되어 있다.”

입니다.


윗글 출처 : http://www.history21.org/zb41/view.php?id=discuss2008&page=2&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603






livemiri (2009-09-04 14:53:52)

중성리신라비 탁본에 있는 제일 왼쪽에 있는 1행의 기록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亲+巳(?)+□ □+中의일부(?)+折+盧+[艹+..]+□..

中의 일부(?)로 파악되는 글자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면, 가운데:중[中]은 꿰뚫는 획[丨]인데 탁본은 꿰뚫지 않고 끊어져 있다. 그래서, 그 부분을 只의 일부로 파악하여 ‘只折盧’(지절로)로 보는 견해(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2846291 )도 발표된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그 다음이 艹로 시작하니 葛文王과도 연결시킬 수 있다.

그러나 ‘只折盧’(지절로)로 보는 견해도 문제가 조금 있어 보인다.
먼저 亲巳와 只(?) 사이에 결실된 부분에 글자를 채워보면 최대 3자 정도가 들어갈 수 있다. ‘只折盧’(지절로)는 沙喙部 소속이니 只折盧 앞에는 沙喙도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래서, 최소한 亲巳(年)(沙喙)只折盧(葛文王) 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글자가 들어갈 부분이 너무 작아 亲巳(年)□□只折盧王으로 추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마지막 盧 다음의 글자가 王으로 인식하기에는 좀 약해 보인다.



livemiri (2009-09-04 15:40:47)

인명에 사용된 글자 비교




냉수리비 沙喙至都盧葛文王, 斯德智阿干支
중성리비 只折盧艹(추정), 沙喙斯德智阿干支
(miri주: 이 부분은 처음 글을 쓸 때 제가 신중하지 못하여 같은 사람으로 파악하였습니다. 그래서 수정합니다. 저는 예나 지금이나 냉수리비의 설德智阿干支와 중성리비의 斯德智阿干支를 전혀 다른 사람으로 인식합니다.
/////참조 : http://www.history21.org/zb41/view.php?id=discuss2008&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634 )/////miri주 끝



봉평비 喙部牟即智寐錦王, 愼宍智居伐干支

천전리각석 원명 眞宍智沙干支 妻 阿兮牟弘夫人」
천전리각석 추명 另卽知太王, 眞宍知□珎干支 婦 阿兮牟呼夫人


위의 인명들은 경주문화재연구서에서 발행한 “포항 중성리 신라비 보고서”에 부록으로 들어 있는 신라금석문의 기록된 인명의 일부를 옮겨온 것이다.

냉수리비가 기록한 지증왕의 이름(?) 至都盧이다. 그러나 중성리비에서 추정하는 지증왕의 이름(?)은 只折盧이다. 발음은 비슷할지언정 글자의 모양은 二자가 완전히 다른 글자다.

다른 사람의 인명을 살펴보자
냉수리비 斯德智 = 중성리비 斯德智 (<== 위 miri주 참조)
봉평비 牟即智 = 천전리각석 추명 另卽知 (牟=另)
봉평비 愼宍智 = 천전리각석 원명 眞宍智 = 천전리각석 추명 眞宍知
천전리각석 원명 阿兮牟弘 = 천전리각석 추명 阿兮牟呼 (弘=呼의 발음은 경상도 사람들 사이에서 같다. 받침의 ㅁ,ㄴ,ㅇ이 비음으로 소리나는 것을 예로 들면, “호동이”를 경상도 사람들은 “호도^이”로 발음한다.)

서로 다른 냉수리비, 봉평비, 천전리 각석에 기록된 동일 인명의 기록을 통하여, “중성리비에서 추정한(?) 글자 只折盧가 지증왕으로 비정된다.”는 추론에는 선뜻 동의하기가 망설여진다. 인명의 소리가 같다고 같은 사람(同一人)으로 볼 수만은 없을 것이다.



livemiri (2009-09-04 17:19:02)

토론자의 글 생략

/////////////// livemiri

“이런 경우는 고지명, 고인명에 매우 많이 보입니다.”고 하셨는데,....

저는 위에 있는 저의 쪽글에서 당시 신라인들은 同一人에 대하여 인명을 표기할 때는 같은 한자어를 사용하거나 거의 비슷한 글자로 기록해 놓았다는 취지의 글을 적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여러 인명도 나열해 놓았습니다.
그 것을 바탕으로 “只折盧와 至都盧를 동일인으로 파악하는 것에는 조심을 하자.”입니다. 설령 只折盧가 원래의 기록이라 할지라도 지절로와 지도로의 발음은 완전히 다릅니다. 삼국유사라는 다리(?)를 하나 건너 只折盧와 至都盧를 같은 인물로 파악하는 것은 더 더욱 위험한 사고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주장에 대하여 님도 선언(?)만 하지마시고 그에 대한 자료도 같이 첨부해 주실 수 있겠는지요?

저는 신라인들의 기록보다도 훨씬 후대의 자료인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또는 그 외 고려나 조선시대의 자료 등은 사양합니다. 그 이유는 후대로 내려오면서 문서에 기록된 글이 오염, 훼손, 마모, 지질의 변형 등으로 인한 다른 글자로의 인식 그리고, 새롭게 판각하는 과정에서의 변형 기타 등등이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후세인의 가감이 있어 원래의 내용을 구분할 수 없는 경우가 많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livemiri (2009-09-05 00:00:15)

토론자의 글 생략


/////////////// livemiri

님의 답글을 읽어보니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기록을 인정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신라인들이 기록한 기록물(예를 들어 중성리비)과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기록된 기록을 비교하는 방법이 저와 많이 다르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예를 들어보면
삼국사기에 기록된 <智證>麻立干立, 姓<金>氏, 諱㉠<智大路>[或云㉡<智度路>, 又云㉢<智哲老>.]에서

저는 //㉠<智大路>, ㉡<智度路>, ㉢<智哲老>는 같은 실체(지증마립간)의 다른 표현이다. 그런데 신라인들이 직접 기록한 냉수리비를 보니 至都盧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삼국사기의 기록된 ㉡<智度路>가 그 중 가장 近似한 기록이구나. 이제 ㉠<智大路>, ㉢<智哲老>는 異說이라고 생각하면 되겠구나!! // 라고 판단합니다.


저는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智大路 = 智度路 = 智哲老’로 파악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或云이나 又云이라는 표현을 통하여 ‘아! 그 중에 하나가 올바른 것이구나.’하는 선택의 문제를 제기한 것이라 이해하고 있습니다. 만약 ‘어떤 분이 ‘智大路 = 智度路 = 智哲老’라고 이해한다.’면 어떻게 해서 이 셋이 동일한 것인지를 논리적으로 주장하면 될 것입니다.



livemiri (2009-09-07 12:00:02)

토론자의 글 생략


/////////////// livemiri

답변 잘 들었습니다.
‘표준화 기준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표기자가 임의적으로 적었다.’는 취지의 답변을 하셨는데, 중성리신라비의 I행에서 ‘결실되어 있는 부분의 글자가 무엇인가?’ ‘그 곳에 인명이 올 수 있는가?’로 시작된 토론이 인명표기 방식에 대한 토론으로 변해가는 느낌을 받습니다.


인명이나 지명의 경우 먼저 표기된 한자가 다르더라도 기본적으로 소릿값은 같거나 비슷해야합니다. 삼국사기에는 智證王의 이름으로 智大路, 智度路, 智哲老가 기록되어 있는데, 大, 度, 哲의 소릿값은 차이가 있습니다.

소릿글자가 없던 신라시대에 교유명사를 기록하기 위하여 한자를 빌려 섰습니다. 그러다보니 신라인들은 소릿값에 가장 가까운 한자를 사용하여 나타내었을 것입니다. 위의 댓글에서 저는 신라인들이 기록해 놓은 동인인의 인명을 비교해 놓았습니다. 인명표기에서 대부분의 글자가 일치하고 있습니다. 천전리각석의 원명과 추명의 경우는 추명을 기록할 때 원명의 글자를 옆에서 보면서 적었기 때문(?)인지 인명표기가 완전히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원명의 阿兮牟弘과 추명의 阿兮牟呼를 통하여 그 당시 신라인들이 인명을 표기할 때, 보다 자신들의 소릿값에 가까운 한자를 선택할려는 그들의 고민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앞의 답글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봉평비(524년)의 沙喙部徙夫智葛文王과 천전리각석 추명의 沙喙部徙夫智葛文王(539년)에서도 같은 한자를 이용하여 인명을 표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봉평비(524년) 愼宍智 = 원명(525년) 眞宍智 = 추명(539년) 眞宍知’는 심방변 하나의 차이를 가지고 있지만 같은 글자로 봐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이처럼 적게는 1년, 많게는 15년 후에 기록된 인명의 표기가 동일하다는 것은 ‘신라인들이 사초 형태의 기록물이나, 또는 여러 중요 사안에 대한 것들을 기록물의 형태로 보관하면서 그 기록을 통하여 다른 문서를 작성하지 않았나. 그래서 여러 기록에 나타나는 인명표기가 같은 한자로 기록된 것이 아닐까?’를 추측할 수 있습니다.


당시 신라인들 사이에 智證王을 부르던 이름이 냉수리비에는 분명히 “至都盧”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슷한 시기 신라인들에 의하여 기록된 곳에 智證王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면, 위의 추론을 통하여 그 글자와 소리는 “至都盧”와 같거나, 아주 가까워야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智大路, 智度路, 智哲老 등에서 智度路가 그나마 신라인들의 기록에 가까운 것이라 판단합니다.


그리고, 智大路, 智哲老 등의 표현은 “至都盧”에 대한 표기가 후대로 전해 내려오면서 어떠한 이유(위의 글에서 여러 예를 들었습니다.)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변형이 된 모습이 삼국사기에 기록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라인이 기록(중성리신라비)한 문서를 후대의 기록인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로 裁斷하는 것에는 전혀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 것은 [삼국지연의]를 통하여 [진수의 삼국지]를 보충할려는 태도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윗글 출처 : http://www.history21.org/zb41/view.php?id=discuss2008&page=2&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608




글 쓴 이 livemiri (2009-09-10 12:25:09, Hit : 306, Vote : 17)
제 목 포항중성리신라비를 부분 번역한 글


포항중성리비에 대하여 제가 문장을 구분해본 결과입니다.



亲巳□□中折盧□」 喙 部習智阿干支 沙喙 斯德智阿干支 敎 沙喙 尒抽智奈麻 喙 部夲智奈麻

夲牟子 喙 沙利夷斯利
livemiri : 喙沙利夷斯利은 喙(부명)+沙利夷(인명)+斯利(관등명)



白爭人 喙 評公斯弥 沙喙 夷須
牟旦伐 喙斯利壹伐 皮末智 夲波 喙柴干支 弗乃壹伐 金評□干支 祭智壹伐

livemiri : 喙(부명)+評公(인명)+斯弥(관등명) 沙喙(부명)+夷須(인명)
牟旦伐을 소유한(牟旦伐에 거주(?)하는) 喙(부명)+斯利(인명)+壹伐(관등명) 喙(부명생략)+皮末智(인명)
夲波(부명)+喙柴(인명)+干支(관등명) 弗乃+壹伐 金評□+干支(또는 金評+□干支) 祭智+壹伐


使人 奈蘇毒只 道使 喙 念牟智 沙喙 鄒須智 世令于居伐壹斯利 蘇豆古利村 仇鄒列支干支 沸竹休壹金知 那音支村 卜岳干支 走斤壹金知
livemiri : 使人인 奈蘇毒只와 道使인 喙부의 念牟智, 沙喙부의 鄒須智는 세간에 居伐壹+斯利와 蘇豆古利村의 仇鄒列支+干支 沸竹休+壹金知 那音支村의 卜岳+干支 走斤+壹金知에게 명령한다.


珍伐壹昔云豆智沙干支宮曰夫智宮奪尒今更還牟旦伐喙作民沙干支
livemiri : 珍伐壹이 예전에 말하길 豆智+沙干支의 宮과 曰夫智의 宮을 빼앗았는데, 이것을 이제 다시 牟旦伐의 喙(부명)+作民(인명)+沙干支(관등명)에게 돌려 준다.(이두식 표현이,...)


使人 果西牟利 白口 若後世更噵人者与重罪
livemiri : 使人인 果西牟利가 입으로 사뢰길 만약 후세에 다시 말하는 사람은 무거운 벌을 준다.고 했다.


典書与牟豆故記 沙喙心刀里□
livemiri : ,...



여기서 잠깐 살펴볼 것

영일 냉수리비의 일부분입니다.
典事人沙喙壹夫智奈麻到盧弗須仇休喙躭須道使心訾公喙沙夫那斯利沙喙(蘇)那支此七人

이 문장은 아래와 같이 구분되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도 斯利가 기록되어 있는데 관등명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번역을 해보면,...

典事人은 沙喙부의 壹夫智奈麻, 到盧弗, 須仇休, 喙부의 躭須, 道使인 心訾公, 喙부의 沙夫那斯利, 沙喙부의 (蘇)那支 이 7사람(此七人)은,.... (livemiri : 喙躭須道使心訾公 바로 뒤에 다시 喙가 기록된 것으로 보아 道使心訾公은 喙부 소속이 아닌 것으로 파악됩니다. 그래서 喙부+道使+喙부의 연결을 보이는 것 같고, 그래서 喙부의 躭須, 道使인 心訾公, 喙부의 沙夫那(인명)+斯利(관등명)로 구분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모두 7사람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중성리비에 기록된 沙利夷斯利는 인명沙利夷+관등명斯利으로 파악되며, 그 뒤의 評公斯弥도 인명評公+관등명斯弥으로 보입니다. 評公과 같이 인명이 公으로 끝나는 경우는 냉수리비에서 道使 心訾公에서 확인됩니다.


지금 발견된 중성리비는 판결문의 후반부로 보입니다. 문자가 기록되어 있지 않은 뒷면이 원래 문자가 기록되어 있었는데 풍화로 인하여 마모되었는지 정밀한 판독을 해봐야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면 비슷한 쌍둥이 비가 하나 더 있어서 전반부의 내용을 새겨놓았는지,...



하여튼 대충이나마 한 번역이니, 너무 나무라지는 마시길,.....



livemiri (2009-09-12 12:53:05)

문장의 성분과 구조



한글이든 한문이든 문장에서의 가장 기본 성분은 주어, 서술어, 목적어, 보어의 4가지 구성성분으로 되어 있다. 이 4가지와 부사어, 관형어 등의 수식어로 문장이 이루어진다.

그들이 어떻게 결합되어 있느냐에 따라서 한문문장은 주술, 주술목, 주술보, 주술목보 등의 문장으로 구분되며, 이러한 결합은 서술어 역할을 하는 놈에 따라 문장의 형식이 정해진다.


남성리신라비에서 다음 문장을 좀 더 살펴보자.
珍伐壹昔云豆智沙干支宮曰夫智宮奪尒今更還牟旦伐 喙作民沙干支

위 문장에서 昔과 今이 대응을 이루면서 과거의 사건과 현재의 사건을 전하고 있으며, 이 부분이 바로 남성리신라비가 세워진 가장 근본 이유를 기록한 부분이다.

과거의 사건은 奪(빼앗다)이 핵심어이며, 현재의 사건은 還이 핵심어이다.
奪과 還은 “~가 ~에게 ~를 빼앗다(돌려주다).”라는 문장구조를 가지는 서술어이다.



今이하의 문장은 “이제 다시 牟旦伐의 喙(부명)+作民(인명)+沙干支(관등명)에게 (그가 빼앗긴 대상을) 돌려준다.”로 해석되며, 뜻이 명확하다. 更이 쓰인 것을 통하여 牟旦伐 喙作民沙干支는 과거에 무엇인가를 소유하고 있다가 그 것을 어떠한 연유로 남에게 빼앗겼는데, 이제 법정분쟁을 통하여 다시 돌려받았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앞문장의 뜻을 파악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그래서 기능성이 있어 보이는 문장의 구조를 만들어 보면,

① 昔云 豆智沙干支宮曰夫智宮 奪 尒[옛날에 이르길 豆智沙干支宮과 曰夫智宮이 이것(尒을 빼앗았다.] 또는, 尒를 뒤의 문장에 붙여 ② 昔云 豆智沙干支宮曰夫智宮 奪[옛날에 이르길 豆智沙干支宮과 曰夫智宮이 빼앗았다.]을 한 문장으로 파악해 보자.

이러한 번역은 “豆智沙干支宮과 曰夫智宮”을 주어로 파악한 것이지만 주어인 “豆智沙干支宮과 曰夫智宮”이 무엇인지 잘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어떤 연구자는 宮을 사람으로 파악하여 “豆智沙干支의 宮과 曰夫智의 宮”이라고 해석을 하였는데,.. 이것도 어색하다. 또, ① 빼앗은 대상(=尒이 앞의 문장에 기록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 것이 나와 있지 않으니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문장이 되어 버린다.② 또한 빼앗은 대상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③ 이번에는 豆智沙干支宮曰夫智宮奪을 국어식한자인 목술관계로 파악하여 목적어(豆智沙干支宮曰夫智宮)+서술어(奪)로 구분하여 “豆智沙干支의 宮과 曰夫智의 宮을 빼앗아,..”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 경우는 뜻이 명료해진다. 그리고 宮의 의미도 한자가 가지고 있는 ‘좋은 집’이라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전체적인 의미를 파악해 보면 아래와 같다.

“豆智沙干支의 宮과 曰夫智의 宮을 빼앗아, 그 것을 이제 다시 牟旦伐의 喙 作民沙干支에게 돌려준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의문 하나가 생기는데, 그럼 “奪과 還을 행하는 주체가 무엇인가?” 이에 대해 필자는 “云하는 자(바로 신라정부)”로 이해한다.

사건의 진상은 “신라정부가 불법(?)으로 豆智沙干支와 曰夫智가 획득한 宮을 빼앗아(奪) 법정분쟁을 통하여 시시비비를 가리고, 그 결과에 따라 牟旦伐의 喙 作民沙干支에게 돌려준(還) 것”으로 파악된다. 냉수리비나 이 비를 통하여 이 당시 신라는 법에 의거하여 민사상 사건을 처리하고 있음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白爭人에 기록되어 있는 牟旦伐 喙斯利壹伐, 皮末智는 作民沙干支의 대리인으로 보인다. 지금으로 치면 변호사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livemiri (2009-09-12 18:17:21)

필자는 몇 년 전에 냉수리신라비를 분석하면서 사안의 중요성에 따라 共論에 참여하는 사람들(왕과 관료)의 차이가 있음을 주장한 적이 있다.^^

봉평신라비를 보면 매금왕과 갈문왕이 같이 등장하고, 또, 냉수리신라비는 갈문왕이 등장하며, 이번에 발견된 남성리신라비는 ,....喙部習智阿干支沙喙斯德智阿干支가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점은 사안의 중요성으로 파악된다. 남성리신라비는 개인 간의 사적 재산인 宮(=좋은 집)의 소유권에 대한 판단을 내린 것이다. 사안의 중요성이 크지 않다보니 阿干支 선에서 모든 결정이 마무리된 것으로 보인다.
이성시교수는 [중성리비 학술 심포지엄]에서 이 宮을 “고대 일본에서 흔히 보이는 '미야케'와 같은 개념으로 파악하여 '宮'을 경주에 기반을 둔 진골 유력 귀족의 食邑과 비슷한 개념”이라고 주장을 하였는데, 필자는 이성시교수가 이러한 사고의 연장선에서 “亲巳□□□折盧□」의 결실된 부분을 只折盧로 파악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그러나 宮을 食邑으로 연결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냉수리신라비에 보는 바와 같이 節居利의 財에 대한 사법적인 판단을 하는 것에 갈문왕이 관여하고 있다. 이 것은 節居利의 財가 가지고 있는 위상이다. 아마 食邑에 버금가는 것으로 보인다. 남성리신라비 또한 국가 또는 국왕이 지급한 食邑에 대한 분쟁이라면 당연이 매금왕이나 갈문왕이 등장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앞선 글에서 □折盧가 지증왕이 아닐 가능성을 충분히 주장하였다.

그리고 냉수리비나 남성리비를 통하여 신라사회는 법에 의하여 사회를 다스리며, 사안의 경중에 따라 매금왕이나 갈문왕이 참여하기도 하고 하지도 않은 사회임을 알 수 있다. 이 점을 이우태 교수가 '냉수리비문이 대법원 전원재판 판결(문)인 데 비해, 중성리비문은 대법원 단독심리 판결문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한 것은 적절한 비유로 보인다.

봉평비, 냉수리비 그리고 이번에 발견된 남성리비는 사법제도를 포함한 전반을 신라 사회의 고찰할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그 문자유물에 대한 파악을 잘못하여 신라는 7명의 왕들이 버글버글거리는 사회라든지, 아직 6부의 일부 또는 몇 개의 관등만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근거로 6부체제나 관등의 구분이 완성되지 못했다는 등의 논의는 잘못된 것이다.
비문에 기록된 것만이 존재했다고 믿는 것은 차라리 오만傲慢일 수 있기 때문이다.



livemiri (2009-09-15 16:27:59)

食邑에 대한 이해와 전재왕권


공직에 있는 사람은 종종 “나라의 녹을 먹는다.”는 말을 듣는다. 이 때 녹이 의미하는 바는 ‘나라에서 주는 봉록’이라는 뜻으로, 국가에서 주는 봉급을 받는다는 말이다. 예전 왕조시대에도 관료들이 있었으며, 그 들 또한 나라로부터 봉록(봉급)을 받았는데, 그러한 것 중에 대표적인 것이 관료전이다.

관료전은 관리가 국가로부터 지급 받은 땅에 대하여 조세징수권만 인정하는 것으로 토지와 농민에 대한 국가에 대한 국가의 지배권 강화하여 귀족관료를 억압함과 동시에 국가 재정을 확보하여 왕권을 강화할 수 있다.

이와는 별도로 食邑이니 녹읍이니 하는 것들이 있다. 녹읍은 관료전과 성격이 비슷하다. 그러나 食邑은 관료전과 현격한 차이를 가진다. 食邑은 지배층인 왕족이나 혁혁한 공신들이 받은 땅으로 조세징수권은 물론 곡물 징수권과 노동력 징발권까지 인정하는 것으로 연구자들은 파악한다. ‘食邑을 지급받았다.’는 것을 좀 더 쉽게 말하면, 국왕에 충성을 하면서 국왕으로부터 지급받은 일정 영역의 땅을 지배하는 [소국의 왕 또는 제후] 정도로 보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성격의 땅을 사사로이 뺏고 뺏긴다는 것은 왕조시대에서 상상하기가 좀 힘이 든다.

5~6세기의 신라사회가 여러 명의 왕들이 버글버글거리는 사회라면 충분히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필자가 삼국유사에 기록된 “사금갑설화”를 분석하면서 毗處王(炤智王)의 절대권력 앞에 나라 전체가 벌벌 떠는 모습을 언급한 적이 있다. 이 시기 신라는 절대군주가 군림하는 완전한 왕조사회였다. 毗處王(炤智王)을 이어 沙喙부의 至都盧葛文王이 나이 64세라는 고령에 왕위에 올라 15년 동안 나라를 통치한다. 이러한 시기에 국가(국왕)가 지급한 食邑을 뺏고 빼앗겨서 국가로부터 소유권에 대한 판결을 받는다는 것부터가 우스운 일이다. 아마 그 당시 豆智沙干支와 日夫智가 牟旦伐 喙 作民沙干支의 食邑을 빼앗았다면 그는 기시에 쳐해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 상상해 본다.



신문의 기사를 보면 이성시교수는 “宮이라는 글자를 고대 일본에서 흔히 보이는 '미야케'('宮'이라고는 말로 자주 표기)와 같은 개념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면서, 결국 비문에서 말하는 '宮'은 경주에 기반을 둔 진골 유력 귀족의 식읍(食邑)과 비슷한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라고 언급하였는데, 중성리 비문에 기록되어 있는 ‘宮’이라는 글자가 ‘식읍을 의미한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중성리 비문에 기록된 宮=미야케]’이라는 주장에 대한 충분한 근거 제시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참고로 日本書紀에서 미야케를 찾아보면, 垂仁天皇二七年 是歲조에 처음 나타난다. (興屯倉于來目邑 屯倉此云彌夜氣) 그리고, 고사기는 景行천황조에 '定倭屯家'이라 하여 처음 나온다. 그 외에도 官家라는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다.



livemiri (2009-09-15 16:32:31)

제 글을 다시 읽어보니 일부 중성리신라비를 남성리신라비라고 한 부분이 있네요. 남성리신라비는 중성리신라비의 잘못임으로 고칩니다. 윗글을 쓸 당시 흥해 중성리 부근 지도를 유심히 살피고 있었는데, 그 때 저의 뇌가 망상을 했는지,...ㅠ.ㅠ 이제 저의 뇌도 맛이 갈려고 하는지,..... 하여튼 죄송죄송,...


윗글 출처 : http://www.history21.org/zb41/view.php?id=discuss2008&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619




글 쓴 이 livemiri (2009-09-17 19:53:00, Hit : 223, Vote : 19)
제 목 喙(훼)와 啄(탁)의 소리값 #1


喙(훼)와 啄(탁)의 소리값 #1


냉수리신라비나 봉평신라비를 보면 신라인들이 직접 기록한 新羅六部에 대한 명칭의 일부가 기록되어 있는데, 냉수리비에는 喙, 沙喙, 本彼, 斯彼가 기록되어 있고, 봉평비에는 喙部, 沙喙部, 岑喙部, 本波部가 기록되어 있다. 그 외 후대의 신라금석문에서도 관찰이 된다. 그러나 13c의 기록인 삼국사기에는 유리이사금 9년조에 梁部, 沙梁部, 漸梁部[一云牟梁], 本彼部, 漢祇部, 習比部로 기록되어 있다.
당연히 신라인들이 자신들의 부명으로 기록한 것들은 喙, 沙喙, 岑喙, 本彼, 斯彼이다. 이것들이 후대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변형이 이루어져 삼국사기에 기록될 즈음에는 梁, 沙梁, 漸梁[牟梁], 漢祇, 習比의 모습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에 비해 本彼의 모습은 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이른 시기의 신라금석문에서 漢祇의 원형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아마 ‘□彼’의 형태가 아닌가 추측해 본다.


각설하고 이 글의 목적은 喙에 대하여 살펴보는 것이다.

‘喙’는 ‘부리:훼’ 字로서 분명 ‘훼’로 소리가 남에도 통상 '탁'으로 읽는다. 그 이유는 일단 '喙(훼)'와 '啄(탁)'이 字形上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喙에 대한 기록은 계림유사에서 찾아진다. 계림유사의 사본은 현존하는 것이 약 20개 정도로 알려져 있는데, 그 곳에 “雞曰/口+遂-辶/音達” 또는 “雞曰啄/口+豕/音達” “雞曰喙音達”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miri주 : 地名學 제13집(2007. 12)에 수록된 김영만의 “신라 지명 喙(훼)와 啄(탁)의 字音상 모순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인터넷에 공개되어 있는 한글(문서편집기)로 작성된 15쪽 분량의 [계림유사] 한글파일에서 雞를 찾아보면 아래와 같이 편집되어 있다.

雞 啄音達 <古>啄査字典無此字乃朝鮮土語

miri주 : <古>에 대하여 한글 문서에서는 출처를 아래와 같이 설명을 붙여 놓았다.
方輿彙(방여휘) 엮은 흠정(欽定)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변예전(邊裔典) 제25권 조선부(朝鮮部) 휘고(彙考) 13 (청 옹정(擁正) 3년(1725) 판본을 중화민국 23년(1934)에 다시 영인한 것) <약호 : 古>

雞曰□의 기록에서 사본마다 □부분의 글자 형태가 조금씩 다른 이유는 “啄査字典無此字乃朝鮮土語”라 한 것처럼 중국인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부분의 글자의 고려인의 소리값에 그 원인이 있어 보인다. 고려인의 소리값은 신라인의 소리값과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雞(계)는 啄(탁,닭)[音은 達(달)]이라 이른다.
한자로 雞라고 쓴 놈은 ‘닥’이라는 놈인데, ‘달’로 발음한다는 것이다. 경상도 사람들은 닭(雞을 달 또는 달구라고 발음한다. 達이라는 발음이 지금의 경상도 사람들과 똑 같다. 예문을 만들어 보자.

“저기 마당에 도라 뎅기는 달 잡아 먹어예.” <== 마당에 돌아다니는 닭을 잡아 먹자.
“달구똥 밟지 말그레이.” <== 닭의 똥을 밟지 말아라.



이번에는 신라인들의 생생한 발음을 들어보자.

삼국유사 歸竺諸師에서 일부를 옮겨온 것이다.

天竺人呼海東云矩矩吒䃜說羅. 矩矩吒言雞也. 䃜說羅言貴也.(天竺人은 海東을 '矩矩吒䃜說羅'라 부르는데, 이 구구타란 닭[계]를 말함이요, 䃜說羅는 귀貴를 말한다.)

필자는 이 기록을 인도로 유학을 간 신라고승들의 바디랭귀지로 이해하고 있다.

인도인이 물었다.
“너희들은 어디서 온 누구니?”
신라의 유학승이 대답했다.
“矩矩吒䃜說羅( 구구 달예. 서얼라)” <==‘예’는 높힘을 나타내는 語尾
월성(달성,달벌)에서 왔다는 것이다. 월성이 바로 달성, 계림이다. 계림은 서라벌이고 서라벌이 바로 신라다.

矩矩吒에서 矩矩는 닭의 울음소리를 나타내는 의성어로 보이며, 吒는 닭(달)을 말하는 것 같다. 䃜說羅言貴也에서 說羅를 빼야 䃜言貴也(예는 존귀를 나타낸다.) 바로 䃜(예)를 붙여 높힌 말을 했다는 의미가 이해된다. 그리고 說羅는 서라벌 또는 신라로 이해한다.





다음에 계속,......



livemiri (2009-09-18 14:41:04)

일연의 글에 보이는 矩矩吒[醫-酉+口]說羅라는 기록은 《大唐西域求法高僧傳》의 阿難耶跋摩의 기록에 있습니다. 그 원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
阿難耶跋摩者。新羅人也。以貞觀年中出長安之廣脅(王城小名)追求正教親禮聖蹤。住那爛陀寺。多閑律論抄寫眾經。痛矣歸心所期不契。出雞貴之東境。沒龍泉之西裔。即於此寺無常。年七十餘矣(雞貴者。梵云矩矩吒[醫-酉+口]說羅。矩矩吒是雞。[醫-酉+口]說羅是貴。即高麗國也。相傳云。彼國敬雞神而取尊。故戴翎羽而表飾矣。那爛陀有池。名曰龍泉。西方喚高麗為矩矩吒[醫-酉+口]說羅也)。
/////////////


위의 글을 보면 阿難耶跋摩에 대하여 ‘新羅人也, 出雞貴之東境。沒龍泉之西裔。’라 하여 雞貴를 신라로 인식하는 태도를 보이지만, 말미를 보면 ‘西方喚高麗為矩矩吒[醫-酉+口]說羅也’라고 하고 있습니다. 신라의 스님에 대한 기록에 高麗가 나타나는 것은 무엇인가 착오가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연 또한 高麗관련 부분을 인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추가/// 또는 일연이 본 책에는 주석문이 없었을 가능성도 있어 보입니다.



livemiri (2009-09-18 15:27:23)

토론자의 글 생략


/////////////// livemiri

냉수리신라비에는 斯羅라는 국호가 기록되어있고, 봉평신라비에는 新羅六部라 하여 新羅라는 국호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후대의 기록인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본기 지증마립간 4년조(서기 503년)에 국호변경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新羅本紀第四 <智證>麻立干 /// 四年, 冬十月, 群臣上言: “始祖創業已來, 國名未定, 或稱<斯羅>, 或稱<斯盧>, 或言<新羅>. 臣等以爲新者德業日新, 羅者網羅四方之義, 則其爲國號, 宜矣. 又觀自古有國家者, 皆稱帝稱王, 自我始祖立國, 至今二十二世, 但稱方言, 未正尊號, 今群臣一意, 謹上號<新羅>國王.” 王從之.

‘新羅’라는 국명으로 변경하기 전에 斯羅, 斯盧 등의 기록이 보이는데, 진작 신라인들의 기록(냉수리신라비)에는 ‘斯羅’라고 되어있습니다. 이번에 발견된 중성리신라비의 折盧가 斯盧와 자획이 비슷하고, 또 글자가 기록된 위치가 국명이 기록될 수 있는 위치 등으로 보아 국명으로 파악할 수 있는 가능성은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 신라인들이 기록한 여러 인명의 비교를 통하여 같은 글자이거나 거의 비슷한 글자로 인명을 표기한 것을 통하여, “만약 이번에 발견된 중성리비에서 국명이 기록되었다면 ‘斯羅’로 기록되어있어야 하지 않을까” 추측합니다.

矩矩吒[醫-酉+口]說羅라는 표현은 ‘신라의 언어’가 ‘인도어(?)’로 기록되고, 다시 한역되는 과정에서 원래 소리값에 변화가 있었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미수다’ 같은 TV프로그램을 볼 때, 한국말을 잘하지 못하는 출연자가 자국어가 아닌 영어로 된 친구의 설명을 듣고 다시 한국어로 표현하는 모습과 비교하면,...(좀 이상하나요??)

‘說羅’는 그러한 과정을 겪은 ‘新羅(신라)’에 대한 소리값으로 판단합니다.


윗글 출처 : http://www.history21.org/zb41/view.php?id=discuss2008&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625



글 쓴 이 livemiri (2009-09-23 01:13:57, Hit : 186, Vote : 8)
제 목 喙(훼)와 啄(탁)의 소리값 #2 - 양서 신라전의 啄評


喙(훼)와 啄(탁)의 소리값 #2 - 양서 신라전의 啄評



양서는 629년 당의 姚思廉이 편찬한 梁의 正史이다. 이 양서에는 중국의 정사기록에서 처음으로 신라전이 입전되어 있다.

그 신라전에 신라가 양에 사신을 보낸 기록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普通二年,王募名秦,始使使隨百濟奉獻方物。// 이 기록과 대응하는 기록이 [三國史記] 신라본기 법흥왕 八年조에 “遺使於梁貢方物”라고 보인다. 그러나 백제본기에는 기록이 없다. 新羅가 최초로 梁에 사신을 파견한 普通 2年(서기 521년)은 法興王 8년에 해당한다.


또, 이 양서 신라전에서 눈여겨 보아야할 기록이 있다.

///////////////////////////////
其俗呼城曰健牟羅,其邑在內曰啄評,在外曰邑勒,亦中國之言郡縣也。國有六啄評,五十二邑勒。 (그 俗에 城을 호칭하여 健牟羅라 이르며, 그 邑이 안에 있는 것[在內]은 啄評이라 하고, 밖에 있는 것[在外]은 邑勒이라 하니, 또한 중국의 말로 郡縣이다. 나라에는 6啄評과 52邑勒이 있다.)
///////////////////////////////

위 글을 보면 健牟羅, 啄評, 邑勒이라는 단어가 들어온다. 이러한 단어들은 분명히 普通 2年(서기 521년)에 신라에서 파견된 사신들을 통하여 얻어진 정보일 것이다.


비슷한 시기 신라인의 기록을 살펴보면 먼저 울진봉평신라비가 있다.


울진봉평신라비는 법흥왕 11년(서기 524년)에 세워진 신라인들의 기록이다. 신라인의 기록(울진봉평신라비)은 1차 사료로써, 그 어떤 2차 자료와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울진봉평신라비와 양서 신라전의 자료를 비교함에 우리는 신라인의 기록(울진봉평신라비)을 먼저 존중해야한다. 그래서 양서 신라전의 기록을 울진봉평신라비를 통하여 교정해 보자.



먼저 봉평비에는 법흥왕이 喙部牟即智寐錦王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牟即智가 양서에는 王募名秦으로 변형되어 있다. 신라인들이 ‘牟即智’라고 부른 자신들의 국왕이름을 梁서가 募와 이름 秦으로 구분하여 기록한 것은 ‘성과 이름에 대한 오해로 파악한다’는 것이 많은 연구자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2번째 봉평비에는 신라왕경에 대응하는 新羅六部와 지방행정조직 중 하나로 보이는 居伐牟羅가 기록되어 있다. ‘봉평비의 居伐牟羅, 居伐牟羅道使 등의 표현에 보이는 牟羅’가 바로 양서에서 城曰健牟羅라 한 牟羅와 글자까지 같다. 또, 양서 신라전은 在內, 在外라는 표현으로 신라왕경과 지방행정조직을 구분하였다. 이어지는 문장이 亦中國之言郡縣也라 한 것으로 보아 啄評과 邑勒을 梁의 관리들은 분명히 행정조직으로 파악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國有六啄評,五十二邑勒이라하여 구체적인 숫자까지 기록되어 있다.


봉평비에 기록된 /新羅六部/와 /⧠⧠牟羅/는 양서 신라전에는 /在內, 六啄評/과 /在外, 五十二邑勒/으로 표현되어 있다. 둘 사이의 대응관계가 명확하다. 그렇다면 邑勒은 무엇인가? 필자는 읍락(邑落)의 신라식(아니면 신라사신의) 발음을 기록한 것에 대한 오류로 파악한다. 그리고, 邑勒을 대신하여 그 자리에 와야 할 단어는 바로 牟羅라고 추정한다.



문장을 살펴보면 먼저 ‘其邑’이라 하여 ‘其’라는 지시대명사를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其’가 가리키는 대상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이다. 그 것을 찾아보면 바로 健牟羅이다. 健牟羅라는 邑 중에 안에 있는 것은 啄評이요, 밖에 있는 것이 邑勒이라는 것이다.(在內曰啄評,在外曰邑勒)





梁을 방문한 신라사신에게 梁의 관리가 물었다.
“너희 나라 임금의 이름이 무엇이뇨?”
신라사신이 대답했다.
“예 牟即智라 하외다.”
梁의 관리는 혼자 되뇌이며 메모를 했다.
‘아!! 募가 성이고 秦이 이름이구나.(王募名秦)’

“당신네 나라에는 성(城)이 많은가?”
“왕경 밖에는 큰(健) 모라(牟羅)가 많아요. 52개나 된다우!! 당신들이 말하는 邑落과 같은 거라우. 그리고 왕경 안에는 6부가 있어요. 喙부 沙喙부,.... ”




다음에 계속,.....


윗글 출처 : http://www.history21.org/zb41/view.php?id=discuss2008&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628

 첨부파일
중성리비에_대한_고찰.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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