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회소식         회원동정

[책소개] <옆으로 읽는 동아시아 삼국지 1> - 한중일 동아시아史를 한 바늘로 꿰어낸 신개념 역사서

1. 역사를 옆으로 읽는다는 것

균형 잡힌 시선으로 관계의 본질과 인과의 핵심을 꿰뚫어 체계를 만들다
역사는 실체가 없다. 없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볼 수가 없고, 기술자의 서술에 따라 역사적 사실의 본말이 전도되기도 한다. 역사의 기술뿐만 아니라 역사의 해석 또한 해석자의 위치와 태도에 따라 그 가치가 뒤집히기도 한다.
따라서 역사를 본다는 것은 가장 공정하고 균형 잡힌 시각과 서술을 유지하는 것이다. 동시에 사건 하나하나 혹은 하나의 지역의 역사를 살피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해야 그 인과관계의 당위성이 관계의 망에서 풀릴 수 있다.
『옆으로 읽는 동아시아 삼국지 1』은 이런 목표로 기획되었다. 특히 전 세계에서 역사 분쟁이 가장 심한 동아시아 지역의 삼국, 한국․중국․일본의 미묘한 ‘쟁점’들을 일국사一國史의 관점에서 벗어나 동아시아 전체적인 흐름에서 파악해보자는 의도이다. 그래서 복잡하게 얽혀 있는 동아시아의 고대사를 정확하고 균형 있게 이해하여, 보다 진취적인 역사 인식을 형성하고자 노력했다.


2. 중국은 왜 동북공정을? 일본은 무슨 근거로 독도를?

아는 만큼 보이고, 알아야 이긴다
고구려는 명약관화하게 우리나라의 역사이다. 그리고 발해 역시 마찬가지이지만, 중국은 발해를 중국사에 편입시키고 일본은 중국사와 한국사 양쪽에 위치시키고 있다. 이것이 지금 동아시아 지역의 현실이다. 영토 분쟁 역시 그 근거는 역사에 있으므로, 첨예한 역사 전쟁은 활화산처럼 진행형이다. 발해는 분명 우리 역사이고 독도는 분명 우리 영토이거늘 저들은 어떤 근거로 자국의 역사와 영토라 주장하는가?
독도 문제는 거의 근대의 문제이므로 이 책의 후속편인 2권에서 거론되겠지만, 동북공정은 동아시아적 국가관 및 세계관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중국은 주周나라 이래로 천명을 받아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을 하늘의 아들(천자天子)이라 하며 하늘과 천자를 부자관계로 설정하고, ‘하늘에는 두 태양이 없고, 백성들에게는 두 왕이 없다’라는 국가관을 형성한다. 이는 중화사상으로 발전하고 주변국들과 ‘조공-책봉’의 관계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를 지금의 중국 역사학자들이 ‘지배-복속’의 개념으로 확대 해석하여 역사왜곡에 앞장서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오랫동안 독립세력으로 역사를 유지해왔던 티베트와 위구르 역시 ‘조공을 바쳤다’는 이유로 중국의 일부로 간주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을 비롯한 주변 국가들은 조공-책봉 관계를 외교적으로 이용하여 중원에서 필요한 것을 챙기는 수단으로 사용해왔다. 즉, 중화사상은 일종의 사상적 원칙이었고 위계질서라는 설정이었을 뿐, 현실에서 이뤄진 것은 아니다. 실제는 국가 대 국가로 전쟁을 일삼지 않았는가. 일본 역시 고대사부터 야마토 정권이 한국을 지배했다는 논리를 펼친다. 이른바 『니혼쇼키日本書紀』에 나오는 ‘임나일본부’설이다. 하지만 이는 입증되지 않고 많은 가설을 동반한 허구일 뿐이다.
이처럼 동아시아 사회에서는 원칙과 현실의 괴리가 심각하게 나타나고 이에 따른 역사 인식의 차이가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 역사 인식의 이면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것 때문에 역사왜곡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역사왜곡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지는 못하지만, 그러한 인과관계와 배경들을 적절히 보여줌으로써 이해에 도달하려 노력하고 있다. 일방적인 주장은 언제까지나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정확한 이해와 분석을 바탕으로 논리와 증명을 통해 역사왜곡에 대응해야 하는 것이다.


3. 왜 동아시아의 정치사 중심인가?

정치는 모든 분야의 요소들을 반영해 나타내는 종합예술이다
정치사를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는 것은 사회 지배층 이외의 삶을 배제하는 것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실제로 고등학교 교과서마저 정치․경제․사회․문화에 대한 서술이 골고루 분배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명분은 좋지만 역사를 한눈에 파악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오히려 정치는 모든 분야의 요소들을 반영해 나타내는 종합예술 같은 측면이 있고, 경제제도 및 사회와 문화현상들이 정치를 중심으로 밀접하게 맞물려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의 흐름을 한눈에 파악하려는 의도를 반영하여, 이 책에서는 동아시아의 정치적 변화를 통해 경제․사회․문화를 포괄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동아시아에는 여러 국가가 있지만 한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중국과 일본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 책은 한․중․일 삼국의 역사에 집중했다. 또한 책 한 권으로 동아시아史를 읽어내는 개설서이기 때문에 1권에서는 삼국의 고대사를 중심으로 서술했고, 중세사는 후속편인 2권에서 다룰 예정이다.
기존의 역사서는 전문적인 내용으로 대부분을 채우고 있어서, 오히려 유물․유적․사건 등이 갖는 역사적 의미와 배경을 설명해주는 데에 소홀한 측면이 강하다. 이는 역사를 배우는 사람들이나 역사에 관심을 갖고 있는 독자들에게 흥미를 반감시키는 역작용을 할 수도 있다. 이 책은 역사의 흐름을 바탕으로 각 사건이 일어나는 인과관계를 이해하기 쉽도록 일목요연하게 서술하면서, 그러한 약점을 보완하는 의미를 가진다.
이 책에서는 기존 학계에서 고조선의 성립 시기를 축소시켜 보는 시각을 지양하고, 임나일본부도 ‘임나’와 ‘일본부’를 분리하지 않고 인식한 점이 오류라는 것을 지적했다. 또한 한반도에서 정권 안보를 위한 통치 이념으로 이용하기 위해 불교를 도입한 측면을 서술하며, 막연히 ‘호국불교적 성격’이라고 서술한 기존의 한계를 극복하기도 했다. 아울러 동아시아의 큰 특징인 조공-책봉 관계를 조명하여 역사왜곡 문제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높였다. 이렇게 기존의 역사 인식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최대한 ‘객관성과 공정성을 바탕으로 여러 주장들을 보여주기’에 충실했다.


4. 개설서, 교양서는 전문서보다 투철한 사명감으로 쓰고 만들어야 한다

숲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학문적 깊이에서 좋은 교양서가 탄생한다
무릇 개설서나 교양서는 하나의 이론 혹은 현상이나 학문을 대중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기획되고 쓰인다. 따라서 학문적 깊이보다는 넓고 두루 설명하거나 예시를 보여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중의 폭이 크므로 시장에서 흔히 눈에 띈다. 하지만 대다수가 설익거나 치졸하거나 나대는 책들이 많다. 그저 쉽게 쓴다는 것으로, 설익은 학문으로 위학僞學을 일삼기 때문이다.
출판사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좋은 개설서나 교양서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나무 사이에서 숲을 볼 수 없듯 숲 밖에서 조망해야 하지만, 나무 하나하나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숲을 헤아릴 수 있다. 따라서 좋은 교양서는 아무리 쉽고 편해야 한다고 하지만, 깊이 있는 학문의 울림과 통찰이 있어야 하고 동시에 치우치지 않은 고른 균형감으로 전체를 조망해야 한다.
저자 이희진은 이른바 ‘공부를 제대로 한 사람’이며 고대사에서 발군의 성과를 얻었다. 그렇지만 전공이 전공인지라 식민사관과 늘 긴장관계에 있었고 내로라하는 학맥에 많이 불편하다. 여전히 대학 강단을 떠돌고 있지만, 어쩌면 한국 학문 풍토에서의 자유로움이 진정한 학문과 맞닿게 하는지도 모른다. 눈치 보지 않고 여러 가지 학설을 검토할 수 있고 말할 수 있으며 쓸 수 있다는 자유가 학문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많이 금기시되는 여러 이론들을 가볍게나마 말할 수 있던 것도 그 탓이다. 덕분에 ‘동아시아 고대의 관계사’라는 민감한 주제를 다룬 이 작은 교양서가 ‘천칭天秤’이라는 이름을 얻고자 노력할 수 있었다.


5.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는 역사의 뒷부분이 궁금하다

한국사, 동아시아史 선생님과 학생들을 위한 훌륭한 개설서
기존 역사 관련 책은 독자들의 입장에서 읽기 편하도록 서술한 것이 아니라, 각 분야별로 전공자들이 자신의 분야에 대해 서술하는 형식을 띠고 있다. 이러한 형식은 각 부분이 일관적으로 연결되기가 어렵다. 또한 교과서를 통해 배우는 역사는 사건의 의미나 배경, 원인 등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심하게 말하면 역사 교과서는 ‘약간 구체적인 연표’ 그 이상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처음 역사를 배우는 학생은 물론이고, 경험이 많은 교사조차도 역사의 흐름을 잡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그러한 교과서의 단점을 보완하여, 이 책에서는 ‘교과서에서 빠져 있는 퍼즐’을 채우며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역사책이나 교과서에서는 미처 알 수 없었던 역사의 뒷부분까지 동아시아 관계사를 통해 한 바늘로 꿰어내듯이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다. 한국사에서만 볼 때는 “왜 그랬을까?”라는 의문점이 생기는 부분이 있지만, 동아시아史 전체에서 보면 “아하, 그렇구나!”라고 깨달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에 관심이 있는 일반 독자는 물론이고, 특히 고등학교에서 <동아시아사>를 선택과목으로 하는 학생들과 그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에게도 훌륭한 개설서 및 부교재가 될 것이다.


6. 동아시아 역사를 흥미롭게 읽어보다

◆ 기자조선과 기자동래설의 진실은 무엇인가? 과연 기자는 가상의 인물이었을까?
◆ 고조선 청동기문화는 기원전 10세기가 아니라 기원전 2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 부여-고구려-백제는 모두 ‘동명’을 같은 시조로 모셨다.
◆ 왜 일본은 유독 신라와만 적대관계를 가지게 되었을까?
◆ 임나일본부는 백제가 가야와 왜인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재편한 ‘임나’와 ‘일본부’로 구분되는 별개의 개념이다.
◆ 삼국의 불교 도입은 ‘국가체제의 정비’만이 아니라 왕권강화를 위한 ‘통치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다.
◆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는 ‘전투’에서 지지 않았다?
◆ 동아시아 역사의 초기 단계에서는 국제사회에 그 흔적을 남기지 못한 일본
◆ 중국의 황제에게 책봉을 받는다는 것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다는 의미인 동시에 외교전의 일부이다.
◆ 국가적 차원의 역사서 편찬은 역사가 권력에 봉사하는 것이었다?
◆ 일본에서 대단히 의미 있는 사건으로 포장된 ‘백촌강 전투’의 진실
◆ 신라가 당을 이긴 원인은 정치적인 안정 때문이 아니라 토번 때문이다.
◆ “해 뜨는 곳의 천자가 해 지는 곳의 천자에게 보낸다”-일본의 위상의 과대평가
◆ 신라사회가 붕괴할 정도의 영향을 준 선종, 그리고 교선의 대립

@ 기자조선과 기자동래설의 진실은 무엇인가?
(…) 논란은 기자조선이 실제로 존재했느냐는 점부터 시작된다. 기자조선 문제는 기자라는 인물에 대한 전설과 연결되어 있다. 의리를 지키기 위해 주를 떠난 충신인 기자는 주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하고 상의 유민遺民을 이끌고 떠났다.
설화에서는 기자가 주를 떠나 기자조선을 세웠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기자가 동쪽으로 도망하여 조선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의 백성들에게 예의 · 양잠 · 방직 · 팔조법금 등을 가르쳤다는 얘기도 있다. 이를 이른바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이라고 한다. 이 내용들은 여러 사서史書들에 나타나 있다.
많은 전문가들이 한漢 이전의 기록들에서는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기록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 등을 근거로 하여 믿지 않는 경향도 있다. 과거 기자동래설을 인정하지 않았던 중요한 이유는 만주와 한반도의 청동기가 중국과 다르다는 점과 고조선 청동기가 기원전 10세기 이전의 것이라고 보기 어려운데 기자는 그 이전 사람이라는 점 등이었다.
이러한 근거들이 뒤집힌 상황에서는 굳이 기자와 고조선의 관계를 끊으려고만 할 필요는 없다. 또 기자도 특정 인물로만 볼 게 아니라, 기자를 시조로 여기는 집단으로 볼 여지도 있다. 사실 고조선과 공통의 조상을 가진 상의 유민이 주에게서 벗어나려 할 때, 같은 문화를 가진 고조선을 찾았을 가능성을 무시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 1장 <문명과 역사의 시작> 27~28쪽


@ 고조선 청동기문화는 기원전 10세기가 아니라 기원전 2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보통 고조선이라고 하면 이른바 단군조선과 기자조선, 위만조선을 통틀어서 가리키는 말이다. 이 중에서 고조선의 시작과 관련된 문제는 제일 먼저 세워진 단군조선의 성립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단군신화 등에는 그 건국연대가 기원전 2333년으로 전한다. 기록대로라면 중국의 초기국가보다도 훨씬 이른 시기에 나라가 생긴 것이다. 이 때문에 그동안은 이 시기를 믿지 않는 경향이 강했다.
(…) 그런데 최근 발굴에 의해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랴오허유역에서 이전까지 알려져 왔던 것보다 훨씬 이전에 만들어진 청동기문화가 발견된 것이다. 이 지역에서 발견된 청동기문화는 기원전 2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만주-한반도지역의 청동기문화가 기원전 10세기 이전이 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았던 근현대 초기 발굴 성과를 완전히 뒤엎는 사실이다. 또한 이 지역에서 발견된 청동기문화는 상商의 청동기문화와 고조선 청동기문화의 공통 조상이라는 점이 밝혀졌다. 이 사실은 비교적 최근에 와서야 밝혀졌지만, 아직도 이를 반영하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
이와 함께 한반도에서 발견된 청동기 유물도 만들어진 시대가 훨씬 이전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대한민국 교과서에서도 한반도의 청동기 유물이 기원전 15세기에 만들어졌다는 점을 인정하는 단계까지 왔다. 앞으로 더 올려볼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는 상태이다(여기에는 약간의속사정이 있다. 이전에도 한반도의 청동기 유물 일부는 만들어진 연대가 기원전 15세기 부근으로 나왔지만 그때까지 알고 있던 청동기 유물의 연대와 너무 달라 뭔가 잘못된 측정결과가 나왔다고 생각해서 무시해왔던 것이다).
- 1장 <문명과 역사의 시작> 21~23쪽


@ 임나일본부는 ‘임나’와 ‘일본부’로 구분되는 별개의 개념이다
이 문제에 관련된 학설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하나는 일본의 야마토大和 정권이 4세기 전반 자신들의 기반을 지킬 필요성을 느껴 한반도 남부에 대한 대규모 정벌사업을 벌였다는 주장이다. 이게 바로 일본 사학자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가 주장한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의 전제조건이다. 두 번째는 신뢰가 떨어지는 『니혼쇼키』의 기록을 믿지 않고 거기에 나오는 가야정벌이 없었던 일로 본다. 이들 주장에서는 당시 백제의 비중을 크게 보지 않는데, 세 번째 학설은 이 정벌에 백제가 깊이 개입된 사실을 주목하여 그 중심세력을 백제로 보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바로 ‘임나일본부’라는 존재이다. 이 실체를 보는 시각이 당시의 국제정세를 보는 것과 직결된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가장 먼저 제시된 학설은 진구 황후神功皇后가 가야를 정벌하고 그 지역을 통치하기 위하여 설치한 기관이 임나일본부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주장은 문제가 너무 많아 그 후 다양한 대안이 나오게 되었다. 그 흐름은 크게 임나일본부가 설치된 시기와 역할을 제한해서 보는 학설과, 임나일본부를 백제가 만들었다는 학설로 나눌 수 있다. 이 계통에서는 백제가 가야를 정복하고 군사령부를 두어 지배했다는 설이 가장 먼저 제기된 학설이다. 이 학설에 대해 임나일본부에 소속된 관리가 왜인이고 백제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는 문제가 생기자, 백제가 가야를 직접 지배하기 부담스러워 왜인 관리를 두어 다스렸다는 이른바 ‘왜계 백제 관료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와는 달리 왜에서 설치한 기관으로 보되, 설치된 시기와 역할을 제한해서 보는 학설도 등장한다.
그러나 이런 학설들은 ‘임나’와 ‘일본부’가 별개의 개념이라는 점을 구별한 것이 아니다. 각 학설들의 약점은 이 때문에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최근에는 백제가 10여 개의 세력으로 갈라져 있는 가야와, 그들과 별개의 세력인 왜인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하여 임나를 재편하고, 일본부를 설치하게 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 2장 <분열과 분쟁의 시대> 168~169쪽


@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는 ‘전투’에서 지지 않았다?
백제가 신라를 침공하면서 벌어진 전투가 바로 관산성管山城 전투이다.

관산성 전투
보통 이 전투에 대해 백제군이 대군을 일으켜 신라를 공격하였고, 지금의 옥천지역인 관산성 부근에서 전투가 벌어져 백제군이 참패했다는 식으로 단순하게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는 달리 초반에는 백제군이 관산성을 함락시켰을 정도로 주도권을 잡고 있었고, 성왕도 전투 중에 전사한 것이 아니라 전황과 상관없이 사비에서 관산성으로 오려 하다가 매복에 걸려 전사했다는 점을 주목하기도 한다. 즉, 백제는 전투에 이기고 전쟁에 졌을 뿐이라는 것이다.

백제는 이 전투에서 패배했다. 그러나 군사적인 측면에서만 보면 관산성 전투 자체는 백제군에 그리 큰 타격을 준 것이 아닌 듯하다. 그러나 이로 인한 정치적인 타격은 컸다. 성왕은 물론, 성왕이 믿고 의지하던 측근들이 전사하는 바람에 백제 왕권의 지지기반이 눈에 띄게 약화되었다.
거기에 반대하는 원정을 강행한 데 대하여 백제의 귀족들이 위덕왕威德王에게 압력을 넣어왔다. 위덕왕은 속세를 떠나 출가하겠다는 의사를 비침으로써 사태를 수습했다. 만류를 무릅쓰고 신라 원정을 감행한 책임은 귀족들이 지명하는 사람들을 대신 출가시키는 것으로 타협이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백제는 여러 가지로 후유증을 앓으며 국가적인 전략도 변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관산성 전투 이전까지만 해도 고구려와의 공방전에 비중을 두어왔었으나, 관산성 전투 이후에는 신라와 공방전을 벌이는 비중이 월등히 높아진다. 관산성 전투 이전에 신라를 직접 공격하는 일이 거의 없었던 점을 감안하면 획기적인 변화라 할 수 있다.
- 2장 <분열과 분쟁의 시대> 187~188쪽


@ 중국 황제에게 ‘책봉’을 받는다는 것-국제적인 인정인 동시에 외교전의 일부
책봉을 받는 측에서 실제 지배권 밖의 지역에 대해 인정을 받으려 하는 이유도 어떤 지역을 지배하고 있다든가 지배하려는 의도와는 거리가 멀다. 중국의 황제에게 책봉을 받는다는 것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다는 의미이다. 인정받는 과정에서 가급적이면 비중 있는 나라로 인정받으려 한다.
책봉이라는 것 자체가 중국을 중심으로 한 일종의 외교전이기 때문이다. 당시 백제만 하더라도 고구려의 장수왕이 남제의 태조에게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으로 책봉을 받자, 동성왕東城王이 사신을 보내 복속을 청한 것도 이런 경우이다. 동성왕이 복속을 청한 것은 독립을 포기하겠다는 의도가 아니라, 남제에 대한 외교관계의 주도권을 일방적으로 고구려에 내주기 싫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조공과 책봉이라는 것이 이렇게 외교전의 일부이기 때문에, 정치적인 이익이 없으면 언제든지 일방적으로 끊어버릴 수도 있다. 백제의 개로왕蓋鹵王은 북위에 조공을 하며 고구려를 토벌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래도 들어주지 않자 조공을 끊어버린 경우도 있다.
이런 외교전의 와중에서는 책봉을 해주는 측도 상대국의 비중에 따라 책봉의 등급을 냉정하게 처리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객관적이라기보다 책봉해주는 측의 이해관계가 더 크게 작용했다고 보아야 한다. 왜의 외교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송이나 남제 같은 중국의 나라에서는 왜를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비중 있게 대해주려 하지 않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당시 왜는 항상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한두 급 정도 아래의 등급으로 책봉을 받고 있었다. 국제적으로 비중이 큰 나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관계는 오래 지속되지도 못했고, 다음 시대인 수 · 당대에 비해 큰 효과를 거두지도 못했다. 결국 왜의 5왕이 중국에 사신을 보내며 교섭한 것은 어떻게든 국제사회에 진출하면서 선진문물의 도입선을 다변화하려는 노력이었을 뿐인 셈이다.
- 2장 <분열과 분쟁의 시대> 196~198쪽


@ 신라가 당을 이긴 것은 정치적인 안정이 원인이 아니라 토번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신라가 당과 싸워 사실상의 승리를 거둔 원인으로 정치적 안정을 꼽는다. 하지만 굳이 신라만 정치적 안정을 이루었기 때문에 강대국 당의 압박을 견디어낸 것 같지는 않다.
신라가 대제국 당의 압력을 견디어냈던 그 원인을 아시아 전체적인 정세에서 찾는 경우도 있다. 이 전쟁에서 당의 신경을 심하게 건드렸던 세력으로는 지금의 티베트에 있었던 토번吐蕃을 꼽을 수 있다.
토번은 660년 당이 백제 원정에 나선 틈을 타서 당 제국 서쪽에 자리잡고 있던 토욕혼吐谷渾을 정복했다. 그 후 시간이 조금 걸리기는 했지만, 이를 계기로 결국 당과 전쟁 상태에 돌입했다.
당이 고구려 정벌까지 끝낸 후, 토번 쪽으로 칼끝을 돌린 670년 3월 신라가 당에 선제공격을 가한 것도 바로 이 틈을 노린 조치였다. 670년대 내내 계속된 당과 토번의 전쟁은 신라와 당의 전쟁에도 여파를 미쳤다. 당과 토번의 전쟁이 치열해지면 신라와 당의 전선이 소강상태가 되고, 토번 쪽이 안정되면 신라에 대한 당의 공세가 강화되었다.
신라와 당의 전쟁이 끝나게 된 것까지도 결국 토번 쪽 사정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676년 토번 내부에 분열이 생기자 당이 대규모 토번 정벌에 나섰고, 이 때문에 반대쪽에 있는 신라와의 전쟁에 신경을 쓸 수 없었다.
- 3장 <통일의 시대> 243~244쪽


@ “해 뜨는 곳의 천자가 해 지는 곳의 천자에게 보낸다” -일본의 위상의 과대평가
견수사는 스이코推古 천황 시기 섭정으로 있었던 쇼토쿠聖德 태자의 지시에 따라 파견되었다. 600년에 첫 번째 견수사를 파견한 이후 618년까지 5회에 걸쳐 보냈다. 기본적으로는 수에 보내는 조공사절朝貢使節이다.
견수사 파견의 기본 목적은 중원을 통일한 수와 친선관계를 유지하며, 국제 정세에 유연하게 대처한다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다른 차원의 문제도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당시 왜는 중원과 직접 교류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한반도, 특히 백제에 선진문물 도입을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수와 교류한다는 것은 선진문물 도입선의 다변화라는 의미도 있었던 셈이다.
이때 수에 대한 일본의 태도를 두고 왜의 기개나 적극적 외교 자세로 높이 평가하는 경우가 있다. 국서의 첫머리에 “해 뜨는 곳의 천자가 해 지는 곳의 천자에게 보낸다”고 쓰여 있었다는 점을 두고 그렇게 평가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하지만 이는 천황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근대적 시각으로 과대포장한 흔적이 뚜렷하다. 다른 나라에서 왜로 파견되는 사신의 지위는 대부분 하급관리로 나타난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당시 왜의 위상을 과대평가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 3장 <통일의 시대> 251~252쪽


7. 저자 소개

@ 지은이 이희진
고려대 사학과와 한국학중앙연구원 석사를 거쳐 서강대에서 가야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 국사편찬위원장인 이성무 박사의 장남이지만, 늘 역사학계의 비주류임을 자청한다. 고대사가 전공인지라 이른바 식민사관과 항상 긴장관계에 있고 이를 끊임없이 문제제기하면서 여러 형태로 낙인이 찍혔다고 주장한다. 서강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했지만 학생들의 평가와는 반대로 고정이 되지는 못했다. 답답하여 시작한 저작 활동은 간결하면서도 흡인력 있는 문장으로 저술가로서의 입지를 크게 다졌다. 스타크래프트를 예시로 들어 삼국시대의 전쟁을 해설한 『전쟁의 발견』(동아시아, 2004)이 화제가 되었으며, 『식민사학과 한국고대사』(소나무, 2008)는 격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 책을 집필하면서 출판사의 요청인 ‘객관성과 공정성을 바탕으로 여러 주장들을 보여주기’에 충실하려 노력하였으나, 여전히 역사학이란 스스로 유리한 논리만을 개발하는 정치 논리가 아니며, 일국사一國史 혹은 국사國史의 시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이 책의 핵심이며 동아시아史를 읽는 방법론이자 교육의 본질이라 생각하고 있다.

@ 을 중심으로 본 저자의 최근 활동
현재 저자는 온라인상에서 칼럼과 블로그를 통해 고대사 역사왜곡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보이며 특유의 깔끔한 논리와 전개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저자 블로그: 역사 그리고 핏빛향기 http://dk7117.egloos.com/2125876)
최근에는 8·15 특집 (334회. 2013년 8월 11일 방송)에 출현해 일본의 역사왜곡 문제에 대해 의견을 피력했다.
(http://wizard2.sbs.co.kr/w3/template/tp1_review_detail.jsp?vVodId=V0000311936&vProgId=1000126&vMenuId=1002036&cpage=1&vVodCnt1=00334&vVodCnt2=00)

“이것이 일종의 ‘공상허언증’이라는 거죠. 일본 역사가 그렇거든요. 일본이 사실 역사를 제대로 따져 보면 그들 『일본서기』 같은 데 쓴 것처럼 세상의 중심으로 주변 세력을 지배한 역사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처음에 역사를 쓸 때에는 그 열등감을 숨기기 위해서 있지도 않은 역사를 조작해서 넣어놨는데 문제는 그게 1,500년이나 이어오면서 사실인 것처럼 믿어지고 이게 굳어져 온 거죠.”
- 에서 발췌


8. 추천사

한국의 역사는 고립된 것이 아니다. 섬나라의 역사조차도 주변 세력과의 교류가 있기 마련이니, 대륙의 끝에 자리 잡고 있는 지역의 역사에 주변과의 관계가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현재 우리는 중국·일본 등과 역사를 두고 갈등을 빚고 있는 중이다. 요즘 역사를 둘러싼 갈등을 보면 사소한 특징을 침소봉대하여 국수주의적 역사를 만드는 데 악용하는 일도 흔하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일본의 논리에 근거가 되고 있는 그들의 역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그들의 논리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대응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우리의 역사와 함께 주변의 역사를 함께 살피는 데에 소홀했던 경향이 있다. 사실 진작부터 이러한 시도를 한 책이 있었어야 했다. 이제라도 이와 같은 내용을 담은 책이 나온 것이 다행이다. 이 책의 출간으로 그동안 쌓여 있었던 문제가 많이 해소되기를 기대해본다. 한국사 전반을 정리한 개설서의 아쉬움을 이번 책으로 인하여 많이 달랠 수 있게 된 것 같다.
『옆으로 읽는 동아시아 삼국지 1』은 역사를 배우는 학생들에게도 큰 도움이 될 듯하다. 사실 교과서는 내용이 너무 소략하고 딱딱해서 이해하기 어렵고, 이 때문에 역사에 대한 흥미를 느끼기도 어려웠다. 그러한 부분을 채워주는 책이 필요했던 터였고, 이 책이 그러한 역할의 일부를 할 수 있을 듯하다. 이러한 측면에서라면 학생뿐 아니라 그들을 가르치는 교사, 그리고 역사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유익할 것이다.
- 이성무 전 국사편찬위원장

이 책은 복잡한 한중일 동아시아 역사를 한눈에 보이도록, 정치사 흐름을 중심으로 각 사건의 인과관계를 이해하기 쉽고 일목요연하게 서술했다는 특징이 있다.
특히 정확한 문제의식과 객관적인 시각을 견지하려는 노력이 엿보이고, 기존 학계의 입장 이외에도 다양한 견해를 보여주고 있으며, 주변국과의 관계 속에서 동아시아 역사왜곡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이 책은 역사에 관심이 있는 일반 독자뿐 아니라, 고등학교에서 <동아시아사>를 선택과목으로 하는 학생들과 선생님들에게 훌륭한 개설서가 될 것이다.
- 손승철 국사편찬위원


9. 차례

들어가면서│동아시아를 옆으로 읽는다는 것

1장 문명과 역사의 시작
| 동아시아 연표 |
1. 문명과 국가의 기원
동아시아문명의 기원│고조선의 시작│고대국가의 통치이념과 천손│
상의 멸망과 주의 등장, 그리고 기자조선│주의 건국과 통치이념의 변화
2. 국가의 흥망과 지배이념의 변화
주의 붕괴와 춘추전국시대│진-법가적 통치│한-유가적 통치
3. 한 제국과 주변의 고대국가
문경의 치와 오초칠국의 난│이율배반의 통치, 한 무제│
유교 원리주의자 왕망의 개혁과 실패│광무제의 등장과 후한│
고조선ㆍ부여와 중원제국│삼한의 등장과 가야│삼국의 건국과 국가체제 정비│
고구려와 중원제국

2장 분열과 분쟁의 시대
| 동아시아 연표 |
1. 중국 위·진에서 5호16국
삼국의 분열과 일시적 통일│진의 일시적 통일│5호16국시대의 시작│조와 전연│
전진과 대(북위)│후연과 후진│양과 남연ㆍ북연ㆍ하
2. 중국 북조
북위의 화베이 통일과 개혁│북위의 멸망│동위ㆍ북제│서위ㆍ북주
3. 중국 남조
동진│송ㆍ제│양│후경의 난│진
4. 한국
신라의 팽창과 가야, 그리고 왜│고구려와 위ㆍ전연의 협력과 충돌│
근초고왕과 동맹체의 형성│한국 고대국가들의 불교 도입│
광개토왕의 등장과 정세의 변화│장수왕과 국제관계의 파란│
가야ㆍ백제의 재기와 신라의 세력 정비│고구려의 쇠퇴와 가야의 좌절│
성왕의 등장과 파란│신라의 팽창과 혼란
5. 일본
국제사회에 등장한 왜│야마토 정권과 진구 황후│왜 5왕의 대중국 외교│
야마토 정권의 정비와 씨성제│소가씨의 등장과 쇼토쿠 태자


3장 통일의 시대
| 동아시아 연표 |
1. 중국
수의 통일과 문제의 업적│후계구도의 파란과 양제의 즉위│수의 멸망과 당의 건국│
당 태종 이세민과 그 업적│측천무후의 시대
2. 한국
고구려ㆍ수의 전쟁과 분쟁의 확대│연개소문의 등장과 고구려ㆍ당 관계│
연개소문과 당 태종의 충돌│신라의 위기와 극복│백제의 멸망│고구려의 멸망│
신라와 당의 전쟁│신라 무열왕계의 등장과 골품제│
원효ㆍ의상의 등장과 불교계의 변화
3. 일본
아스카시대의 견수사와 소가씨의 몰락│다이카개신과 덴지 천황│
진신의 난과 덴무의 개혁

4장 고대사회의 혼란과 붕괴
| 동아시아 연표 |
1. 중국
당 현종과 개원의 치│안사의 난│당의 체제 붕괴와 절도사의 성장│
이정기 세력의 등장과 몰락│황소의 난과 당의 몰락
2. 한국
대조영과 발해의 건국│신라ㆍ일본의 분쟁과 발해│발해와 당의 분쟁│
발해 문왕과 천도│신라 중대의 종말│신라 하대의 혼란│장보고의 등장과 의미│
발해의 혼란│발해의 중흥과 멸망│신라의 도당유학생│신라의 멸망
3. 일본
일본의 율령체제 확립│율령체제의 동요│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등장과 몰락│
‘신라정토’와 발해ㆍ신라ㆍ일본 관계│간무의 즉위와 헤이안시대의 시작│
헤이안쿄와 헤이조쿄 천도를 둘러싼 갈등│셋쇼 정치

마치면서│동아시아적 세계관과 역사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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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면]옆으로읽는동아시아삼국지.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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