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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城里碑가 보여 주는 의미 -신라6부와 관련하여_

작성자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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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학계에서 신라6부의 성립에 대해 段階的 成立설 . 分化說로 논의되어졌지만, 中城里碑를 보면 신라6부에 대해 다시금 보게 하게끔 한다.이 비를 보면은'沙啄斯德智阿干支'.'沙啄爾抽智奈麻'에서 '사탁', '牟旦伐啄斯利壹伐皮末智'.'牟旦伐啄作民沙干支'에서 '모단벌탁','本波啄柴干支'에서 '본피탁' 여기서 공통으로 보이는 '啄'과 '啄評公斯彌'에서 '탁평',金評**1)干支'에서 '금평( 제견해에서 습비부로 보는 견해도 있음)' 여기서 공통으로 보이는 것은 '評'이다.2) 이 '啄評'은 중국사서인 <梁書> 東夷傳 新羅傳에 '其邑在內曰 啄評 亦中國之有郡縣也 國有六啄評 五十二邑勒 ...', 또한 <南史> 東夷傳 新羅傳에는 '其邑在內曰 啄評 在外曰 邑勒 亦中國言郡縣也 國有六啄評 五十二邑勒 ...' , <唐書> 東夷傳 新羅傳에도 '邑在內曰 啄評 外曰邑勒 有啄評六 邑勒五十二 ...' , 또한 通典 邊防門東夷傳 新羅傳에 '其邑在內曰 啄評 在曰邑勒 亦中國之言郡縣也 國有六啄評 五十二邑勒 ...'라고 기록하고 있다(중국사서의 인용은 <支那史料抄> :조선사학회편:경인문화사).이 기록에서 주목되어지는 것은 '六啄評(啄評六)'이다. 이는 금석의 기록와 문헌의 기록이 일치함에 부정의 거리를 두기 어렵다.3) 그렇다면 육탁평을 신라6부로 이해하여도 무방할 것 같다.4) 신라 6부를 탁과 평으로 분류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즉 사탁.모단벌탁. 본피은 '탁'으로, 탁평. 금평은 평으로 둘 분류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한기부( 漢只‘伐’部)5)는 탁의 분류인지 평의 분류였는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 가 없다.6) 우선 신라6부가 탁과 평으로 분류될 수가 있을 때 신라6부의 내용문제(유력부의 문제. 부의 내부구조문제. 부의변동등)도 여기에서 부터 시발점이 되어 검토가 이루어져야할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牟旦伐啄 '을 牟梁部(漸梁部.岑啄部)로 보는 견해(이문기.전덕재.이용현)에 따를 경우 이 부는 <三國遺事> 에 보면 智哲老王條에 牟梁部 相公의 女를 왕비로 맞이하였다는 기사가 보이고, 동 왕력진흥왕편에 진흥왕의 비가 牟梁里英失角干의 녀로. 原宗興法條에 '按眞興乃法興之姪子 妃思刀夫人朴氏 牟梁里英失角干之女'로 된 기사가 보이는데, 牟梁里를 牟梁部로 곧 바로 연결시키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지만은 우선 부로 취할 수 있다면 미약한 부는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되어진다.즉 왕의 비를 배출시킬 정도로 유력한 부였다는 것이다.7) 이 부가 울진 봉평비에서는 '岑啄部'로 보인 부이다. 이 부가 본비에서 모단벌탁으로 표기되었는데, 이 부가 취득한 것이 수취권인지 다른무엇인지를 추정할 수 없지만은 다시 취득을 했음은 본비에 보이는 5부에서 미력한 부가 아니라, 이 비가 세우질 시기에는 다툼에서 되돌려 받을 수 있을 정도의 세력은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혹시 부간의 세력 변동이 있었음을 시사하는것이 아닐까 한다. 山尾幸久는 <三國史記> 智證麻立干 四年條에서 국호를 (新羅)로결정하고,군주호를 (麻立干)으로 부터 (王)으로 변화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이의 배후에는 왕도에 의한 지배집단의 새로운 결집으로 추측한 바'8)가 있었다.
또 본비에서 주목되는 것은 敎를 내린 집단과 敎를 받은 집단에서 <啄部> 외에는 첫째줄에도 둘째줄에도 <部> 字가 없는 <沙啄> 으로만 명기되었다.그런데 白爭人집단에서는 같은 시기인데도 <部> 字가 없는 <啄評> . <沙啄> . <牟旦伐啄> . <本波啄> . <金評> 으로만 명기되었다. 이는 같은 교를 내린 집단의 경우에도 <部> 字를 칭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고, 백쟁인 집단에 속한 경우에는 탁부라고 하여도 <部> 字를 칭할 수 가 없고 평의 遺制9)가 남아 있는체 <탁평> 으로 명기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금평> 으로만 명기된 것도 같은 이유로 보아진다.또한 위에서 기술한 탁의 분류는 아직도 탁의 유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될 수도 있겠다. 유독 교를 내린 집단에서 탁부만이 <부> 자를 칭하고, 백쟁인집단에 속한 경우에도 같은 급에 속한 관등이 명기되지 않고 있다.즉 탁평과 사탁의 경우에는 인명만 명기되어 무관등이지만은10), 교를내린집단에 탁부와 사탁의 관등인<~阿干支>가 명기되었음으로 간지군의 분화는 이루어졌음을 보여 준다. 모단벌탁의 경우에는 <牟旦伐啄作民沙干支> 에서 <沙干支> 로 명기되었음은 이미 간지군의 분화가 이루어졌다는것을 보여 주고 있으며11), 그러기에 비간지군의 하위의 관등인 '壹伐'이 명기되었다12), 본피탁과 금평의 경우에는 간지군의 관등에서 <干支> 만이 명기되었는데, 이는 간지군의 분화가 이루지지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13), 이는 신라6부의 경우 부간의 격차가 존재했음을 시사하여 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즉 본비에 보이는 5부의 격차는 탁부>사탁>모단벌탁>본파탁.금평으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여진다.


1)중성리비의 탁본을 보면 글자 새길수 있는 공간이 2자이상을 넘지 못 한는데, 관등이 새겨졌다면 <沙> 자가 명기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은, 표기방식을 볼 때 <阿> 자가 명기되었을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沙> 자가 새겨졌다면 인명은 단자이고, 두자가 인명이라면 금평의 **의 관등이 <干支> 일 수도 있겠다. 인명의 표기방식에
있어 '本波啄柴干支'에서 '柴'와 같이 단자로 명기된 경우가 있으나. 표기방식으로 볼때 후자일 가능성이 짙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浦項 中城里新羅碑 발견기념 학술심포지엄󰡕 자료집, 2009.9.3.> p11에 실린 탁본에 의거함.
2)三上喜孝는 고대일본의 경우에는 701년 다이호우율 <大寶令> 시행 이전에 행정단위로 <評> 字가 사용되었다고 한다.즉 '일본에서는 후지와라궁 <藤原宮> 출토의 荷札木簡에 701년의 다이호우율 <大寶令> 시행을 경계로 행정단위인 #코오리#의 표기가 #評#에서 #郡#으로 변하고 있다'고 하였다.((三上喜孝 <고고자료서의 목간> (제11회 한국고대사학회 하계세미나), 2009.7.23~24.에 발표된 발표문. p.1 ))
< <隨書> > 東夷傳 高麗傳에 보이는 '復有內評外評'의 '評'자를 山尾幸久와 武田幸男은 행정단위로 보았다.( 山尾幸久, 1974 「朝鮮三國の軍區組織」『古代朝鮮と日本』, 龍溪書舍.;武田幸男, 1980「6世紀における朝鮮三國の國家體制」『東アジア世界における日本古代史講座』4.;전덕재 <포항중리비의 내용 과 신라6부에 대한 새로운 이해> << 한국고대사연구>>56.pp.104-105.에서 재인용
3)강종훈은 양서의 '탁평'과 본비의 '탁평을 연결짓는 것은 무리라고 했다. 즉 '『양서』에 ‘啄評’이라는 용어가 나온다고 해서, 금석문에서 똑같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위험하며, 중성리비의 ‘喙評’이 곧 『양서』 신라전에 보이는 ‘啄評’을 의미한다고 연결짓는 것은 무리이다.' (강종훈 <포항 중성리 신라비의 내용과 성격> '신발견 포항 중성리 신라비' 학술대회(09.10.7일(수)-8일(목); 포항시청)에서 발표될 발표문 p.9 주16)라고 했다. 그러나 양서 동이전 신라전과 남사 동이전 신라전에 보이는 '宋時曰 新羅 或曰 斯羅 '에서,'斯羅'와, 通典 邊防門 東夷傳 新羅傳에 보이는 '新羅卽其一也 (初曰 新盧 宋時曰 新羅 或曰 斯羅'에서 '斯羅'가 영일 냉수리비에 '斯羅'字와일치한 경우가 있기에 굳이 부정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한다.
4)村上四男은 六啄評을 신라6부로 이해하였다 (村上四男: <新羅王都考略> < <朝鮮學報> >24.1962:< <朝鮮古代史硏究> >:pp106~126.((李文基 <울진봉평신라비와 중고기의 육부문제> < <한국고대사연구> >2,p155.에서 재인용':문경현은 이를 王都 六部로
이해하였다.( <문경현<영일냉수리비에 보이는 부의성격과 정치운영문제> < <한국고대사연구> >3,p159)
5)안압지 출토 調露2年銘 벽돌:김창석: <중성리 신라비에 대한 몇가지 고찰> '신발견 포항 중성리 신라비' 학술대회(09.10.7일(수)-8일(목); 포항시청>에서의 토론문 ,p6에서 재인용
6)김창석은 한기벌부의 변화를 ' <한지벌 → 한지벌훼 한지벌(훼)부 한기부> 의 변화를 상정할 수 있다'라고 했다.(김창석: 위의 글 p.6 ) 그런데 신라 6부를 탁과 평으로 분류될 때, '한지벌훼'일 가능성도 있겠지만, 아직은 단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한지벌평'일 가능성도 열어 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한다.
7)< <한국고대사연구> 2.종합토론,pp241~242에서 이기동은 이러한 견해를 발언한 바 있다.
8)山尾幸 久( <古代의 日朝關係> 1章 日本古代王權의形成과 日朝關係 4절 아세아國家의 形成과 日朝關係, p310.
9)주 2)와 '평'자가 행정단위라면 평의 유제가 행정단위로서의 유제일 가능성도 있겠다.
10)12)탁평과사탁의 경우에 무관등이. 모단벌탁의 경우에는 간지군의 하위 관등인 '일벌'이 백쟁인집단에 참여하여도 본피탁. 금평의 간지군과 비슷한 위치에 존재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11)본비(중성리비)의 아홉째줄에 명기된 '頭智沙干支'가 신라6부중에 어느 부에 속하였는지를 현재로서는 알 수 가 없다.
13)간지군의 분화가 이루지지 못했을 정도로 세력이 미약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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