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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의 기년 복원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567


일본서기의 기년 복원



영화를 보다보면 영화 말미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반전을 경험할 때가 있다. 필자 또한 일본서기를 읽으면서 수많은 반전을 겪었고 그 재미가 생활의 활력소가 되곤 하였다.


일본서기 신공섭정기는 읽다보면 의문부호를 찍기에 충분한 기록하다. 앞서 필자는 일본서기 신공기에 숨어 있는 卑彌呼와 壹與의 기록을 보여 주었다. 그런데 이 위지와 진서를 인용한 기록에는 전혀 본문이라고 해야 할 부분을 발견할 수 없다. 고작해야 39년조의 是年也 大歲己未。와 65년조의 是年晋武帝泰初二年。이라는 시간을 나타내는 표현만이 존재한다. 그래서 필자는 일본서기 신공섭정기에서 39년, 40년, 43년, 66년의 분주를 지우고 다시 읽어 볼까한다.


자!!! 4개의 기록을 지워버리니 어디에도 卑彌呼와 관련된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武內宿禰란 사람의 행위가 유독 많이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일본서기에서 武內宿禰를 검색해보니, 武內宿禰는 경행천황 때부터 등장하여 인덕천황 때까지 살아 있다. 그리고 允恭천황 때에 이르러 그가 죽어서 묻힌 묘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도저히 인간의 수명이 아니다. 그래서 왜 이러한 장수 기록이 있는지의 근본이유를 찾아보자.



일본서기는 천황의 즉위와 관련하여 太歲干支를 기록해 두었다. 그리고 각 천황紀 마다 재위 년수를 기록해 두었다. 그런데 일본서기를 읽다 보면 太歲干支로 추정한 제위연수와 천황紀에 기록되어 있는 재위년수가 일치하지 않는 기록을 발견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대 神武의 태세간지는 辛酉이고 2대 綏靖의 태세간지는 庚辰이니 79년으로 제위한 것인데 천황紀는 재위 76에 崩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식으로 기록을 찾아보면 懿德천황에서 1년의 차이를, 성무천황에서 1년의 차이를, 應神천황에서 2년을, 反正천황에서 1년의 차이를 보인다. 필자는 이러한 차이가 무엇인지 오랫동안 의문에 잠겨 있었다.




필자는 드디어 그 의문점을 해결하였다.
김성호박사의 “씨성으로,...”를 펼쳐 321쪽을 보면 그가 복원한 [5천황의 재위년수와 왜오왕]이라는 표가 있다. 그 표를 보면 그는 천황紀에 기록된 태세간지에서 30을 빼서 나온 값을 통하여 천황들의 실질적인 제위년도를 찾았다. 그런데 그가 찾은 방식은 “30”이라는 숫자에 얽매여 잘못된 태세간지를 사용하였다.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는 태세간지와 그에 대응하는 서기년도는 아래와 같다.

천황이름 응신 인덕 이중 반정 윤공 안강 웅략
태세간지 경인 계유 경자 병오 임자 갑오 정유
서기년도 270 313 400 406 412 454 457

그런데 김성호박사는 이 태세간지를 아래와 같이 계산하였다. 그 표를 보면

천황이름 응신 인덕 이중 반정 윤공 안강 웅략
태세간지 경인 계유 경자 병오 임자 갑오 정유
서기년도 390 433 460 466 472 454 456


그가 태세간지의 의미를 모르지 않았겠지만(?), 자신이 발견한 “30”이라는 숫자에 맞추기 위하여 자의적으로 서기연도를 배정한 것으로 보이며, 이것은 사료를 왜곡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그가 발견한 “30”이라는 숫자는 미완성이지만 일본서기의 기년을 해결하기 위한 큰 성과였다. 그는 30이 의미하는 바는 이해하였지만 그 본질이 무엇인지는 파악하지 못하였다.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는 기년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30, 60, 90”이라는 3개의 숫자가 필요하다.

먼저 신무천황의 재위년수에 3의 차이가 발생함을 먼저 언급하였다. 응신천황의 재위연수는 2의 차이가 발생한다. 그런데 응신과 신무는 같은 인물이다. 광개토대왕의 남정으로 응신은 그리운 고국 땅을 뒤로 하고 일본열도로 떠난 존재이다. 그가 한반도에서 재위한 년수가 “즉위전 7년”이다.




이 응신과 신무에 더하여 놓은 30과 60이 일본서기의 기년을 복원하는 열쇠이다. 그리고 90이라는 숫자도 필요하다.(뒤에서 다시 설명하기로 한다.)



필자는 앞선 글에서 일본서기에서 신공65년의 기년을 언급한 적이 있다.

六十五年。百濟枕流王薨。王子阿花年少。叔父辰斯奪立爲王。

신공 65년이 바로 서기 385년이며 이것이 일본서기의 기년을 복원하는 기준점이다.


이제 이 30과, 60, 그리고 90을 이용하여 일본서기에 기록된 천황의 제위년수를 줄이면 실질적인 천황의 재위년도가 찾아진다.(90에 대하여는 말미에서 설명할 것이다.) 그래서 응신, 인덕, 이중, 반정, 윤공, 안강, 웅략의 제위년을 찾아보면

천황이름 응신 인덕 이중 반정 윤공 안강 웅략
재위년수 43(41) 87 6 6(5) 42 3 23
증가 30 60 0 0 30 0 /*/
* 13 27 6 6 12 3 23
실즉위년 390 403 430 436 442 454 457(월년법)


그렇다면 응신과 반정에서 나타나는 1~2년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것은 응신 앞에 기록되어 있는 천황들의 실질적인 재위년수를 찾는 이정표이다.


응신에서 나타나는 2년의 차이는 응신 이후 이중과 반정천황의 즉위년을 늘리지 않은 2명의 천황 수와 일치하며, 반정에서 나타나는 1년의 차이는 반정 이후 윤공의 기년을 늘리지 않은 1명의 천황 수와 일치한다.



그렇다면 신무에 있는 3의 차이, 懿德에 있는 1의 차이, 성무에 있는 1의 차이 또한 동일한 방법으로 이해하고 즉위년을 찾아보자.


성무 천황 아래로 즉위년을 늘리지 않은 천황을 찾아보면 중애천황이 9년 재위하였다. 앞서 응신과 반정의 경우는 한 명 건너 재위기간을 늘이지 않은 천황이 존재하였는데, 이 번에는 바로 다음 천황이 재위기간을 늘리지 않앗다. 이러한 사고로 신무와 懿德을 살펴보면, 신무 이래로 3명의 천황의 즉위년은 늘리지 않았으니, 綏靖천황 33년 재위, 安寧천황 38년 재위, 懿德천황 35년 재위한 것이다. 또 懿德천황 아래 孝昭천황이 83년을 재위한 것으로 된다. 孝昭천황이 실제 즉위한 기년을 찾아보면, 서기 216년이다.





삼국사기를 펼쳐보자. 이즈음에 무슨 사건이 있었는가?
신라가 변한 12개국을 집어 삼킨 거대한 전쟁이 있었다.

그래서 일본서기는 孝昭, 孝安, 孝靈, 孝元의 연대기를 작성하지 않았다. 그리고 신라에 병합된 증표로 “효孝”자를 조합하여 천황의 시호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 綏靖, 安寧, 懿德의 연대기는 왜 없는가?
그들의 연대기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있기 때문에 기록하지 않은 것으로 추측된다. 아마 이들의 기록을 남겨두었더라면 일본서기의 기년 조작이 바로 들통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개화를 마지막으로 서기 354년에 즉위하는 崇神천황에 이르러 신라로부터 실질적인 독립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신라본기에는 포상팔국전쟁 이후 가야의 기록이 사라진다.




이제 신라로부터 독립한 가야가 신라를 상대로 벌이는 복수전을 일본서기를 통하여 확인하기 바란다. 다급한 신라는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고,....


또 다시 전쟁에 패배한 응신은 종묘사직을 짊어지고 일본열도로 떠나간다. 그 옛날 포상팔국전쟁의 패배로 도망간,,, 비미호가 갔던 땅에 응신(+신무)이 다시 가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서기는 비미호의 망명을 지울 수가 없어 중애기를 둘로 나누어 신공섭정기를 두지 않았을까? 아니면 실질적으로 섭정한 여왕이 있었을 수도,... 그러나 일본서기가 신공에게 천황이라는 칭호와 역년대수를 부여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비미호의 기록을 남기기 위한 장치로 보인다.




자 이제 전쟁이 끝이 났다.
응신(=신무)는 일본열도로 떠나고, 이제 그 곳에는 새로운 왕조가 세워진다.
가락국기에 기록되어 있는 기년을 복원하면 잘 알 수가 있다.



기록을 보자.
後漢世祖光武帝建武十八年壬寅三月禊浴之日
.....
靈帝中平六年己巳三月一日后崩. 壽一百五十七.
.....
獻帝立安四年己卯三月二十三日而殂落. 壽一百五十八歲矣.



건무 18년은 은 서기 42년이며 입안 4년은 서기 199년이다. 그리고 가락국기는 수로왕이 158세까지 산 것으로 기록하였다. 여기에 바로 숫자 “90”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서기 199년 - 90 = 서기 109년”


실질적으로 수로왕은 109년에 붕어하고 그 뒤를 일본서기에 보이는 綏靖천황이 수로왕을 이어 재위에 오른다.


그래서 일본서기를 찢어 1대 신무천황은 15대 응신천황와 결합시켜 하나의 인격체를 만들고 신무천황이 잇던 곳에 가락국기의 수로왕의 기록을 결합하면 이제까지 전혀 보지 못한 또 하나의 사서가 완성된다.


그리고 가라국기에 보이는 居登王 이하의 왕력은 무엇인가?

이 것이 바로 광개토대왕의 남정 이후에 새롭게 세워지는 나라의 첫 왕이다. 거등왕은 서기 410년에 왕위에 올라23년을 재위하고, 그 후 여러 왕들을 거쳐 말왕인 구형왕의 재위 11년에 이르러 신라에 병합되는데 그 해가 서기 532년으로 구형왕 말년 임자(壬子)이다.
삼국사기를 펼쳐 보기 바랍니다.


삼국사기와 가락국기는 그 곳에 숫자 “30”의 비밀을 넣어 두었다.

제가 작성한 연표를 따로 올려놓겠습니다.






다음에 계속.//
ver. 0. 0. 99999

매사냥을 하는 수로왕의 눈빛이 보이십니까?
감사합니다.





출처 : http://www.history21.org/zb41/view.php?id=discuss2008&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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